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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찾기 두 번째: 『글 읽기와 삶 읽기』 1,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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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기와 삶 읽기 2 – ![]() 조혜정 지음/또하나의문화 |
조한 선생님의 지적 여정을 살펴보다가 책의 정리보다 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펼쳐보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글 읽기 – 증오와 배제, 닮음의 양가적 감정, 그리고 구체성의 발견.
켜켜이 먼지가 쌓여있는 오래된 책을 꺼내 본다. 대학교 1학년 사회학 수업에서 읽으라 했던 책, 그 때는 읽지 않고 레포트 월드에서 Copy and Paste 기술로 레포트를 냈다. 이런 책은 간지러운 책으로 보였고 난 2000년대에 80년대 운동권들이 읽었음직한 ‘자본’, ‘국가’, ‘혁명’, ‘민족’, ‘통일’의 키워드가 있는 책들만 읽었고 그 ‘중심적’ 논의와 상관없는 ‘부차적’ 논의들은 모두 부르주아 논의라고 생각했다.
대학 생활동안 스승이라고 생각한 2명의 선생이 있었다. 한국 정치사를 전공한 신복룡 선생과 83학번으로(구태여 내가 학번을 쓰는 건 그녀의 모든 학문의 출발이 수업 시간에 곧장 창문 밖으로 투신하여 자살한 친구를 본 그녀의 실존적 선택의 맥락을 말하고 싶어서다) 미국이 망하기를 기대하면서 국제정치라는 학문을 시작했던 배영자 선생이 바로 그들이다. “증오하면서 배척하면서 사실은 닮는다.” 내 대학생활의 일정부분엔 그 양가적인 측면이 상존했다.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이고 그것만 해결(미군 철수, 북미 불가침 조약 체결, 연방제 통일)하면 된다는 마지막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들이 내가 처음 몸으로 부대낀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운동권 언니’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모호하게 섞인 채 그 선배를 ‘꼬셔보겠다고’ NL 운동권이 되었다. 2000년대에 난 한 순간의 결정으로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김일성 종합대학 깃발을 들고 2001년 한양대에서 있었던 한총련 출범식에서 건국대 새내기 대표로 뛰어다녔다. 주사파 인자 코스를 밟기 위해 선행과정으로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고 『역사 에세이』라는 책을 읽고 다시 박세길의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를 읽었다. 그리고 나서 범민련의 문건들을 읽었고 김일성 선집을 읽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서 읽었던 강준만과 진중권, 그리고 김규항이 가르쳐준 진보에 대한 나름의 기준들이 있었지만 몇 만(사실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의 ‘학우 대중’이 집결함이 주는 강렬한 에너지에 빨려들었고 가슴이 벅차옴도 느꼈다.
지금까지 억압당하던 집단이 해방을 이루어 낸 역사를 보면 그것은 단순히 ‘자리 바꿈’의 역사가
아니었다. 지배/피지배의 틀, 곧 관계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갈 수 있는 수준에까지 대항 담론이 발전해 가야 비로소 해방이
가능했다(2권, p.61).‘비분 강개형’ 지사들이 주도한 그러한 감정적 저항의 자세가 우리로 하여금 보다 현실적인 저항을 하는 힘을 빼버렸다면 이 부분을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2권, p.63)
하지만 민족주의의 격렬한 가슴 뜀은 봉제공장에서 미싱사로 일하는 엄마와 빌딩 경비를 하는 아빠의 일상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걸 ‘민족모순’으로 설명해보려 애써봤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어디엔가 ‘정답’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때 학생회실 귀퉁이에 있는 이진경의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을 읽었다. 난 순식간에 다시 철지난 맑스-레닌주의자가 되었다. 어제의 동지는 하룻밤에 적이 되었고, 내게 술을 사주던 선배들은 모두 내게 욕을 하는 선배로 돌변했다. 그들과 싸우려고 도서관에서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철지난’(?) 책들을 모조리 읽었다. 『현실과 과학』이라는 80년대 PD 그룹의 책들을 읽고 이진경의 『민족 자본가 비판』, 『주체사상 비판』 등을 읽었다. 내 독서는 싸우기 위한 무기였다. 거기에 내 말은 없었다. 나는 이념을 선택했지만, 이념이 나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들과 더 이상 싸우게 되지 않았을 때에도 내 독서는 늘 그런 식이었다. <제2대학>이라는 대학생들의 학회운동 모임에 가서도 그들이 들뢰즈와 푸코를 읽기에 나도 그것들을 그들보다 많이 읽고 빨리 외우는 방식을 채택해서 그들과 싸웠다. 난 논쟁에서 언제나 ‘때려 부수는 방식’ 이를테면 “x 알아? 공부 좀 해”라는 식의 수법을 썼다. </p>
달리 말해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든지 우리 자신들 속에 담화 공동체를 만들어 가지 않으면, 삶을 읽어 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탈식민 담론이라는 것도 또 다른 문화적 종속을 강화하는 이론에 그치고 말 것이다(2권, p.91).
사실 알고 보면 그 밑바닥에는 열등감이 깔려있었다. 고등학교 때 사회과학을 알고 사춘기가 연장되었다. 중학교 때의 사춘기 감정은 알 수 없는 불안의 느낌이었다면 고등학교 때의 사춘기 감정은 사회에 대한 ‘불만’의 느낌이었다. 집에 가는 길 생각 없이 ‘있어 보이려고’ 집은 『씨네21』,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에 나온 김규항의 칼럼이 사회과학서를 집게 했고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다가 대담 프로그램에 나온 강준만을 보고선 『인물과 사상』을 보게 만들었다(사실 알고 보면 강준만은 지금까지 총 5번도 TV에 나오지 않았다. 인연이었나 보다.). 하지만 사회과학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우월함’은 성적이 나올 때마다 완전히 꺾여버렸다. 독서실의 내 자리에는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01학번 ”이 써 있었지만, 내 모의고사 점수는 수도권 대학이 간당간당한 수준이었다. 중학교 때 전교 1~2등만 하다가 고등학교에서 ‘딴 짓’을 하다가 얻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열등감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더 짜증났던 것은 성적이 잘 나오는 녀석들이 다 나보다 무식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난 ‘시나공’ 기술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싸움도 못했기에 화도 잘 내지 못했다. 대학에서 더 격렬히 이론에 대해 집착하고 가장 급진적으로 보이는 이론들을 채택했던 건 순전히 ‘있어 보이려고’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대학에서는 잘 때리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성찰’이라는 걸 해보게 된 건 순전히 내가 대학 1~2학년 때 리더를 맡았던 모든 조직이 와해되거나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등에 업혀 있을 때는 가장 활발하고 정력적인 구성원이었지만 내가 뭔가를 맡아서 끌고 가려할 때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생각은 많고 그것들을 다 펼쳐내야 하는 상황에서 난 늘 고민에 빠지곤 했다. 거대담론들은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일 머리’가 없다는 것 때문에 고민했지만 늘 내가 하고 싶은 생각들의 입장에 ‘선배’는 없었다. 어찌되었던 내가 해결하거나 그나마 비슷한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매일 밤 소주를 마시고 집에서 울다가 뻗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불현듯 드는 생각은 나 역시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누군가와 닮아있었다는 것이다. 선배들의 민족주의적 감성이 촌스럽고 그들이 권위적이고 폭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나 역시 일을 하면서 전혀 ‘대안적’(alternative)이지 않았던 거다. 가치들은 구체적인 층위에서 뻗어야 했으나 나 역시 후배들에게는 폭력적인 언사를 뿜어대며 질책만 해대는 선배였던 것이다. 뭔가 다른 방법들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 유도리를 갖고 일(행사)을 잘 할 수 있게 된 순간에도 일이 끝나고 나면 내 주위의 사람들은 상처를 입고 주위에서 떠나가곤 했다. 내 진심이라는 것들은 잘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집회를 기획하고 참여하면서 늘 불편했다. 이미 집회의 패턴은 매뉴얼화 되어있었고 집회가 시작되면 늘 부르던 민중가요를 다 같이 ‘한목소리로’ 부르고 모두 오른 손을 같이 들고 팔뚝질을 하고 같은 목소리로 선창하는 지휘자(?)의 구호를 따라하는 집회. 모두 줄을 맞춰서 행진해야 했고 ‘해방’을 하자는 그들(남성)은 집회 후 술자리에서 여성들을 희롱하곤 했다. 집회에 생기가 없었고 국가가 가장 통제하기 쉬운 상태로(진압하든 벽을 쌓든) 집회는 진행되었다. 거기엔 ‘해방의 정치’가 없었다. 늘 집회의 군중은 『글 읽기와 삶 읽기』의 논의에 따르자면 ‘타자화’되어있었다(2권, p.91). 집회의 대중은 자신들의 ‘말’이 없었고 집회를 이끄는 지도부의 ‘호명’을 자기도 반복적으로 따라했을 뿐이다. 난 늘 불만이 있었지만 그 불만을 구체화시키진 못했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어차피 고민을 구체적으로 나눌 만한 선배나 동기도 별로 없었다. 날 지켜주던 동지이자 친구였던 몇 명과 넋두리를 할 따름이었다.
‘구체적’ 일상에서 어떻게 내가 생각했던 대안들이 구현될 수 있는가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적절히 풀 생각은 하지 못하고 늘 뭔가 일을 벌리면 끝나고 다시 ‘환대’하지 못하는 상황들에 봉착하곤 했다. 사실 알고 보면 난 맑스-레닌주의의 말을 하고 그람시의 말을 하고 들뢰즈의 말을 했지만 거기엔 그들의 텍스트가 컨텍스트 없이 겉돌고 있었고 내 재해석은 없었다. ‘내 말’은 없었다. 그냥 머릿속에 이론이 꽉차 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들뢰즈를 알면서 관료제적 업무를 하는 내 모순이 있었던 거다.
군에서 김애란, 김연수를 읽고 프루스트를 읽다.
여기저기 회복되지 않는 상처 몇 가지를 몸 안에 지니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서도 비타협적이고 꼬장꼬장함은 한 번의 사고를 일으켰다. 육군 3사관학교에 학사장교 후보생으로 갔다가 쫓겨났다. 모반을 일으키려했다는 명목이었다. 사실 황당했다. 군사 훈련을 받는 장교 예비 후보생들은 육군의 기준으로 ‘부적격 후보생’을 한 달에 몇 번 지목해서 써 내야 했다(2005년 기준). 그리고 그 후보생 중에 가장 많은 표를 받은 ‘부적격 후보생’은 벌점과 징계를 받곤 했다. 하지만 그 ‘부적격 후보생’은 부적격하지 않았다. 늘 누군가의 ‘시기’하는 마음들이 ‘부적격 후보생’을 만들곤 했다. 난 그걸 참을 수 없었고 그 문제를 공동의 논의 자리에서 지적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결국 내가 ‘부적격 후보생’이 되게 만들었고 난 3사관학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공군에 입대했고 장교가 되었다.
공군장교의 생활이 주는 이점은 자유시간의 확보였다. 7급 공무원의 최초 호봉 정도의 봉급과 자유 시간, 그리고 주말의 확보는 내 ‘공간’의 확보와 더불어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사실 그 전까지 소설책은 전체 독서의 5%가 채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군 생활은 늘 감성의 결핍을 주었고 주위의 ‘문학청년’ 장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추천을 받아 김애란의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내 일상도 퍽퍽했기 때문이다. 『침이 고인다』와 『달려라 아비』를 읽으면서 그녀의 방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273버스를 타고 한예종과 신촌, 종로를 오가는 그녀의 동선이 보였고 자그마한 하숙집 방에서 그녀가 느꼈을 감정선을 따라다닐 수 있게 되었다.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공원에 놀러가서 엄마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흘려서 엄마가 손수건으로 입가와 목덜미를 닦아주던 그 순간의 느낌이 생생하게 내게도 공감으로 다가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오렌지 잼을 먹으며 어렸을 때를 회상하는 것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혼자 고립되어있는 누군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 생각을 지배했던 거대담론의 체계(난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글들도 맥락을 거세한 체 스타일로 소비했다. 푸코와 들뢰즈가 쿨 해보여서 소비했을 따름이었다)가 다 겉돌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국가를 전복시킨다고 계급 해방을 노동자 계급이 추동해서 시킨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행복한 ‘우리’를 만들 거라는 보장을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전제된 주체가 만들어 낼 매뉴얼이 존재하는 집회와 봉기가 세상을 더 낫게 만들 거라는 확신이 없어졌다.
문제는 가시적으로 보이는 모순의 체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층위에 있었다. 국가와 자본의 문제라기보다는 일상의 문제였고, 사회경제적 모순들은 정치경제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의 문화의 문제로 보였다. 우석훈의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를 읽고 단순하게 미국과 한국의 힘의 균형관계만 생각하다가 그 안에서 어떤 층위가 구체적으로 전략들을 행하는 가에 따라서 달라지고 있는 양상들과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문에 어떤 피해를 끼치는 지,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까지를 읽어내는 시도에 놀랐다. 우석훈의 나머지 모든 책을 다 읽었다. 『직선들의 대한민국』에서 우리의 ‘감성’과 ‘미학’을 이야기할 때 무엇을 봐야할 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누구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져야 할 감성, 미학. 그리고 그것들을 ‘말’로 표현하기.
그리고 나의 책 읽기는 변했다. 그건 무엇을 읽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이고, 누구의 이론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어떻게 읽었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모던보이들의 1920~30년대의 구체적 경험들에 주목하게 되고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서울이라는 공간과 그들의 삶을 엮어보려 했다. 내 주위의 친구들이 갖게 되는 일상의 찌들음과 노곤함에 대해 이제야 좀 듣게 되었다. <지구촌 시대의="" 문화="" 인류학="">과 <생태인류학> 조교를 하면서 예전에 건대에서 조교를 할 때의 권위를 내려놓고 좀 편하게 살펴봐야한다는 인식까지라도 가게 되었다. 시속 5km로 뛰듯 걷는 내가 주위를 살피며 감을 잡아갈 수 있는 순간은 언제 올까? 문제는 몸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지만. </p>
감응적 개념. 보여주는 글쓰기. 내 말 하기.
요즘 어쩌다보니 글을 쓰게 되었고 책 쓰는 작업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15년 전에 쓴 말이 여전히 울림 있게 다가온다.
이제 탈식민지를 지향하면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말투’의 글을 되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강한
주장의 ‘말하기’보다 서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보여주기’ 방식의 글쓰기가 어느 때보다 효과적인 글쓰기 방법이 아닐까? 강하고
직선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낼 수 있어야 하고, 같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나의 길이 아니라 많은 길이
열려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2권, p.244).이때의 이야기는 가슴을 차갑게 놓아 둔 채 읽는 글이 아니다. 삶에 대한 감을 잡아 가는
이야기이며, 일상적 용어가 살려지는 글이며, 혼자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껴 가면서 삶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요약하기가 힘들다. 살아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2권, p.245).글을 쓰기 위해서는, 언어를 만들어 가는 직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자기만의 방’을 제대로 확보해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것, 글을 쓰려는 이들은
무엇보다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2권, p.252).
내 말을 하려 한다. 내 말을 쓰려 한다. 누구의 말이 아니라 내가 주관적으로 쓰되 공감하면서 그것들이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그 힘들이 조금 더 확장되어 내가 사는 세계를 구성하는 힘이 되게 만들기. ‘겉도는 말, 헛도는 삶’의 식민지적 지식인들의 상황도 계기들을 통해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통해서 변화의 가능성에 마주치면 달라진다. 『글 읽기와 삶 읽기』1권의 학생들처럼. 자기의 말을 찾을 수 있는 페다고지. 그리고 그 페다고지의 지속과 늘 변화는 세상에 감을 잃지 않으면서 그 목소리들을 함께 나누는 ‘담화 공동체’를 만들기. 대학교 3학년 때 노래패를 락-밴드로 만들면서 선배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었다. 켜켜이 먼지가 쌓인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을 표현하기 위해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난 이제 어떤 이론가의 추종자가 아니라 그와 벗하려 한다. 크게 지켜가겠다 다짐했었던 거대한 신념들(사회주의, 생태주의)에 대한 얼개는 아직 바뀌지 않았지만 그 틈새를 뚫고 또 바뀌어갈 수 있다고 여지를 열어둔다. 그리고 낯선 것들을 만날 때 더 떨지는 않으려 한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 Marc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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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기와 삶 읽기 2 – ![]() 조혜정 지음/또하나의문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