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와 책 사기 – 종각 영풍문고와 광화문 교보문고

엄마와 상관없이 책을 사러 내 스스로 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면목동에 살던 시절이니까 친구 녀석(아마 신준수나 양동경이었을 듯하다)과 함께 사가정 역 1번 출구에서 지하철을 타고 군자까지 간 다음, 5호선으로 갈아타고 광화문 역에 내렸다.

신준수라는 ‘천재’ 녀석. 학원의 선행학습이 아닌 집에서 혼자 골똘이 생각해보고 고3 수능에 나오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었던 녀석. 그 녀석 때문에 서점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1 때 만났던 양동경이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그 녀석은 내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전해주었었다. 실은 <개미>를 다 빌려다 읽은 것처럼 그 녀석에게 말했는데 난 별로 재미가 없어서 읽다가 집어던졌다. 오히려 재미있게 읽은 책은 <타나토노트>였다. 죽기 직전의 가사상태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서울대 수석으로 들어간 사람이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10번 봤다고 하길래 10번을 나도 봤다. 그 이야기를 해 준 게 양동경이다. 신준수를 나는 우러러 봤고, 양동경은 내가 깔아봤다. 양동경보다는 내가 성적이 좋았으니까(양동경, 너 지금 뭐하고 사냐?).

신준수는 도대체 쳐다볼 수 없는 전교 1등이었으니까. 신준수는 내게 하비 콕스의 <세속 도시="">를 중2 때 권했다. 그 때 만약 이 책을 이해하고 읽었다면 난 당장 교회를 때려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검은 것은 글씨이고 하얀 것은 종이이던 단계다(그 책을 막상 읽은 건 2007년이었다). 그런 신준수를 당시에 꺾어보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시샘만 줄창 해댔다. 신준수가 빌려주는 책은 악착같이 읽어보려 해도 읽을 수 없는 그런 책들이었다. 벽초 홍명회의 <임꺽정>은 좀 읽을 만 했다.

여하튼 “책을 사러 간다”는 행위는 중2 때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엄마가 사라고 한 것이나 사야할 것을 정해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책 보고 책을 사기 위해서 가기 시작한 때, 15살이었다. 그 전에도 서점을 다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동네의 <샬롬서점>은 내 단골 서점이었다. 서점 아저씨와 아줌마는 날

매번 책 한 권 사고, 문제집 몇 권 사고 PC잡지(아마 <마이컴>이나 ) 부록을 달라는 아이로

날 기억할 것이다. 면목 우체국 맞은 편 GS 25(당시에는 LG 25) 옆에 붙어있는 매캐한 술냄새가 항상 풍겼던

<요모조모> 옆에 있는 서점은 내 초등학교 시절과 중학교 1~2학년 때까지의 추억이 있는 장소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블루클럽> 남성 전용 미용실이 들어섰다. 벌써 15년은 지난 이야기니 말이다. 당시에 책을 사러 교보문고에 가는 기억은 언제나 KFC 치킨 버거 세트를 먹는 기억과 맞물려 있었다. 엄마가 준 3~5만 원 정도의 돈을 들고 책을 사고 만 원 정도 남겼다가 햄버거 세트를 먹으면서 음악이야기를 하는 것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푸른하늘>의 팬이었던 신준수와 서태지의 팬이었던 나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었는 지 잘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햄버거를 먹으면서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창밖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우리는 교보문고의 갱지 색깔의 쇼핑백이 있었기에 우쭐댔었다. 집에 갈 때에도 개선장군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각 KFC. 지금은 리모델링 중인데, 사진의 정중앙 자리에서 신준수와 떠들곤 했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마자 사회과학을 집었지만 그 때는 항상 책 읽기는 모반의 행위였다. 문제집 풀 시간도 없는데 책은. 딴 짓은 그대로 매를 부르곤 했다. 수능 준비가 짜증났던 건 진중권과 강준만, 김규항, 또 홍세화를 읽으면서 다져진 반골 기질 때문이기도 했지만, 책을 못 읽는 갈증이 가장 심했다. 수능 끝났을 때 가장 좋았던 건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읽어도 졸린 강만길의 <고쳐쓴 한국근대사="">와 <고쳐쓴 한국현대사="">를 하루에 다 읽어버리곤 했다. 수능으로 다져진 엉덩이 체력은 왕성한 책읽기를 보장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간 술만 쳐먹었다. “조국을 걱정하려면 술을 마셔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를 도서관에서 읽곤 했는데 선배들은 “지금 네 단계에서 읽어야 할 책”이라면서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손에 쥐어주었다. 근데 아무리 읽어도 강만길의 책보다 유치했다. 다만 좀 강만길보다는 ‘운동권’ 스럽고 감정선이 드러나니 읽기 수월하기는 했었다. 주사파 운동권도 학교도 내 책 읽기를 항상 방해했고 내 책 읽기는 늘 바깥의 행위였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가 짜증나서 유시민의 <내 머리로="" 읽는="" 역사="" 이야기="">와 호리고메 요조의 <역사를 보는="" 눈="">을 읽었다. 어디가서나 한 동안 나는 ‘주지주의자’로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이 되었을 때 알바를 시작했다.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항상 로망으로 생각했던 알바 자리가 하나 있었다면 그건 바로 교보문고에서 알바를 하는 것이었다. 마침 홈페이지에 공고가 떴고 곧바로 응시했고 책 운송 등을 하는 알바를 하게 되었다. 당시 교보문고의 아르바이트 체계는 휴일도 없고 매주 SHIFT가 일어나는 그런 체계였다. 9시에 출근해서 7시에 퇴근하거나 11시에 출근해서 9시에 퇴근하거나. 노래패에서 부패짱을 맡았던 나는 한 달만에 공연 핑계로 교보에서 도망쳤다. 그 다음부터 교보문고는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일하면서 매일 느꼈던 스트레스도 있고 매일 천장을 쳐다보면서 쉬곤 했는데 천장에 달려있는 빔 모양의 장식이 너무 차가워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교 2학년 때 망우리로 이사를 가게되었다. 거리상으로는 면목동에서 10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지하철 역이 좀 멀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을 걸어가야 상봉역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점차 버스가 익숙해졌고 마침 2003년에 대구 지하철 참사가 난 이후부터 지하철은 시간이 없을 때를 제외하곤 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131번(지금의 271)을 혜원여고 앞에서 타고 책을 읽으면서 종로까지 가는 나들이가 내 여가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학교(건국대학교)에 있을 때는 59번 버스(지금은 721)를 타고 종로로 가곤 했다. 농민신문 앞에 내려서 조금 정면으로 걸어가다보면 SK 사옥 옆에 있는 무교동 낙지 골목 맞은 편에서 SK 사옥 방향으로 건너고 좌측으로 돌아 200m 정도를 걸어가면 영풍문고가 나온다. 영풍문고는 언제나 교보문고보다 한산했고 앉을 데도 책장 아래 쪽에 좀 있었다(지금은 또 없어졌는데). 영풍문고를 다닐 때에는 점차 패스트푸드 햄버거에 질리고 있을 때라서 종각 역 국세청 건물 옆에 있는 <라면 하우스="">를 애용하곤 했다. 2000원 짜리 신라면으로 만든 콩나물을 넣은 떡라면과(지금은 2500원) 1000원 짜리 공기밥으로 점심을 때우곤 하는 게 내 평소 토요일의 일과였고 지금도 그 생활이 내 로망이다. 지금은 책을 읽기 위해 홍대를 많이 가고 거치는 과정으로 종로에 가곤 한다. 예전처럼 <라면하우스>에 자주 가는 일은 없어진 편인데 그래도 종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 중에 하나다. 내 책 읽기와 책 사기는 늘상 근처의 라면집과 같이 놀러갔던 친구와 KFC, 그리고 학교와 선배와 후배가 늘 엮여 있었다. 오늘도 영풍 문고를 쏘다니며 담배 한 대 물고 공상하다가 예전의 추억이 떠올라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