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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아내,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들의 이야기 – 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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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족 이야기 – ![]()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이가서 |
2009/09/18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김진숙, 소금 꽃나무 (2007년 리뷰) 2009/09/14 – [Reviews / Previews/Social Science] – 겉도는 이론, 헛도는 삶을 벗어나기 위한 지도 – 조한혜정, 한국의 여성과 남성 |
엄마의 공장노동, 살림 살이, 아빠의 경비 생활
엄마는 공장에 다녔다. 내가 12살이 되었을 때부터였다. 9시에 출근해서 7시에 퇴근했다. 가끔 잔업이 있으면 야근을 하곤 했다. 그러면 보통 10시까지 일을 했다. 명절 전후로 해서 특근을 또 했다. 토요일의 원래 근무는 오후 5시쯤에 끝나는 것이었는데 명절 전에는 늦으면 10시까지, 12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엄마의 봉급은 120만원이었다. 미싱사를 처음했을 때와 그만두는 2007년까지 엄마의 봉급은 변하지 않았다. 명절 보너스를 10만 원씩 쟁여주는 공장이 있었던 반면에 입 싹 씻고 무급휴가로써 명절을 때우는 공장도 있었다.
엄마의 그런 노동과 상관없이 엄마는 가정주부였다. 난 단 한 번도 엄마의 직업을 ‘자영업’이나 ‘공장 노동’이라고 써 본적이 없다. 엄마가 써주던 시기에 엄마가 일단 그렇게 쓰지 않았고, 내가 직접 쓸 순간이 왔을 때(대학 이후) 나 역시 엄마를 ‘가정주부’라고 썼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엄마가 일을 하거나 말거나 엄마는 늘 밥을 지었고 반찬을 만들고 빨래를 했다. 그 와중에 아빠 역시 ‘반업 주부’가 되었다. 엄마의 몸의 노곤함을 아빠가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아빠는 일을 ‘돕’다가 나중에는 집에서 가장 가사 노동의 완고한 ‘장인’이 되었다.
엄마가 봉제공장을 선택한 것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아이들 밥 챙겨주고 점심 때 오후 간식꺼리를 준비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집 주위에는 봉제공장들이 많았다. 만드는 옷들은 다 비슷비슷했다. ‘메이커’ 최종 마감을 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집에 ‘명품’까지는 안 되어도 ‘중가’ 이상의 브랜드 옷들이 좀 있는 데 그건 순전히 마감 작업 후에 ‘검사’ 과정에서 불량이 발견되어 탈락된 옷들을 엄마가 수선해서 가져온 옷들이다. 처음에는 불량난 옷을 집에 가져왔고, 나중에는 일부러 티 안나는 불량을 만들어 집에 가져왔다. 애들은 그래서 내가 잘 사는 줄 알았던 경우도 있다. 예전엔 우리집이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 했고 늘 엄마한테 배우기로도 또 혼자 다짐하기로도 먼저 돈 내고 돈 때문에 궁상떨지 말자의 신조를 지켜왔다.
아빠는 내가 10살 때부터 경비생활을 했다. 잘 나가던 ‘청년 공장주’였던 아빠는 허리병이 도진 이후로 육체 노동이 밑바탕이 되는 개집 공장(2009/08/03 – [Life Log/Chronology] – 개집 공장)을 접었다. 그리고 부동산 공인중개사를 하려고 하다가 자격증 취득에 실패하자 롯데월드를 시작으로 관리업종으로 갔다. 관리업종의 특징은 교대근무를 한다는 거였다.주,야,비,주,야,비 식으로 근무를 하곤 하셨다. 롯데월드 생활이 끝나고 I그룹에서 일하게 되었을때 아빠는 하루 근무, 하루 휴무 식의 패턴으로 일을 하셨다. 아침에 출근하는건 똑같은데 퇴근도 아침이었다.
아빠는 늘 집에 도착하면 늦은 아침을 잡숫고 씻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잠이 드셨다. 그 시간에 나와 동생은 학교에 갔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좀 갈등이 생겼다. 일단 아빠는 잠을 청할 시간인데 대학교 수업이 없는 날이거나 토요일 같은 경우에 나와 동생은 쌩쌩하게 시끄럽게 떠들며 놀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왔고 그 날 아빠의 수면시간은 그 시간으로 끝이었다. 아빠도 그 생활을 2007년까지 했다.
우리 가족에 있어서 부모님의 맞벌이는 선택이었던 적이 없었다. 늘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늘 ‘전업주부’ 엄마를 상상했고, 엄마는 사실 크게 다름없이 내게 보조를 맞추려 했지만 10대의 나는 엄마의 노동 생활이 싫었다. 늘 엄마한테 공장 다니지 말고 부업으로 하라고 버럭 대들곤 했다.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한 명의 여성으로 이해하게 된 건 더 최근의 일이다.
조주은, 현대 가족 이야기
대학원에 들어와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과 며칠 전에 수다를 떨었다. 어쩌다보니 내 어렸을 적의 이야기를 좀 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가 추천해준 책이 <현대 가족="" 이야기="">였다. 난 그냥 제목만 듣고는 현대를 Hyundai가 아니라 Contemporary의 현대로 알아들었다. 교보 말고 다른 곳에서는 모두 책이 절판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곧 바로 교보에 가서 책을 사 들었다. </p>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경우 자신의 이야기를 전제로 깔고 논의를 진행한다. 그것은 자신의 관점이라는 것을 ‘중립’적이라고 가정하지 않고 명확히 밝히는 출발이자, ‘도구적 합리성’의 기준이 아니라 ‘공감’을 통한 ‘소통-합리성’을 통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사실 ‘중립’이라는 것들이, ‘공정함’이라는 것들이 누구의 기준에서 중립적이고 공정한가. 그것들에 대해 묻기 시작하고, 그 밑바닥에 깔린 성인-남성-가부장제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이 페미니스트들의 전술이다. 물론 세상에는 페미니스트들의 숫자 만큼은 아니어도 깨나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입장들이 분화되어있는 게 사실이다. 아직 공부가 짧거나 그녀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공감이 좀 잘 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안 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예전에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한 내 적대감은 명확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냉소에서 출발했다.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좀 ‘재수없는’ 것으로 인지되곤 했고,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 때문에 작동하는 문제라고 판단할 경우 늘 여성의 편에 섰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게 여성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좀 더 ‘쿨Cool’한 남성이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말해도 완전히 틀렸다고 부인할 자신이 없다. 이를테면 ‘세련된 21세기판 흑기사주의’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흑기사는 자신이 궁지에 몰렸을 때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가족을 죽이곤 한다. 백제의 계백이 ‘치욕’을 면하게 한다며 가족을 몰살하는 장면이 바로 그 이야기다. 거기에는 남성중심적인 흑기사주의의 한계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자기 주관적 결정이 ‘명예’라는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와 만나 가부장적 권위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여성과 아이들을 죽이는 결과를 맺어내는 것이다. 또한 죽이고 죽고 나서도 그를 ‘영웅시’하는 숭배의 민족주의 프레임이 작동하는 거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에서 여성주의를 말하는 사람들 곁에서 반대를 대놓고 한 적은 없지만 뒷담화의 대상으로 그들은 늘 나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건 사실 명확하게 대상도 정해놓지 않은 무지막지한 거였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 선호와 비선호를..)
어쨌거나 조주은도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서울 안암동(나랑 고향이 같다)에서 태어나 이대 사학과 나온 여자로 무역회사와 비서를 하닥 모순에 느낀 조주은은 노동운동가와 결혼을 해서 울산으로 내려간다. 현대 자동차에서 일하는 남편은 교대근무를 한다. 일 주일은 주간 근무를 하고, 그 다음 주는 야간 근무를 한다. 그리고 야근과 초과 근무를 하고, 주말에는 특별 근무(특근)을 한다. ‘노동귀족’ [footnote]사실 노동 귀족이라는 이야기는 프랑스 노동자들이 제3 세계의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호위호식 한다는 의미였다.[/footnote]이야기가 세상에서는 이제 상식이 되어버렸다. 뭐 이를테면 시간제 비정규직 노동을 하는 사람이나 하청 노동자에게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노동 귀족’으로 느껴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피를 토하면서 수명을 바쳐가면서 일을 한 대가로 받는 임금이다. 덕택에 근골격계 질환과 과로사가 끊임없이 발생한다. 1주일에 몸의 자세를 바꾸지 못하고 경직된 상태로 60시간을 노동한다(물론 현대의 파견직은 같은 일을 하고 절반의 임금을 받는다).
그리고 남성 중심의 노동산업이기 때문에 ‘노동문화’는 늘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을 만들 수밖에 없다. 또 그 남성들은 빨리 결혼하길 원하며 스위트 홈을 기대한다. 와이프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집에 들어오기 싫어하는 남성들도 있을 정도로 강고한 노동과 가정을 분리하려는 남성들은 빨리 결혼하고 싶어하고 아이들도 빨리 둘 씩은 낳고 싶어한다. 정에 굶주려있고 고된 노동과 대비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이다.
현대 자동차 자본이 제공하는 기업복지의 혜택은 또 집단거주를 하게 만들었다. 사원 아파트라는 공간이 펼쳐진 것이다. 여기에서 이색적인 현대 가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공동체는 여성과 아이들의 공동체이다. 조주은은 ‘배운 녀자’로써 자아 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고 여성학을 공부하러 올라왔던 ‘서울 색시’였지만 나머지 경우 대다수는 실업계 출신의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직급 위계자체에 특별히 차이가 없고 직급이 올라갈 경우에도 ‘자본의 노예’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싫어서 ‘평사원 공동체’, 즉 노동자성이 강한 노동자들의 아내들이고 생활수준도 비슷하다. 몇 년 벌면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아이들 학원을 보내는 지가 빤하고 그 경험들은 서로에게 공유된다. 대신 진입조건(membership)이 있는데 그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둘 씩은 낳는 게 기본이다. 그녀들에게 아이들은 남편이 없을 때에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 주고 무서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 벗이기도 하다. 종영한 드라마 <잘했군 잘했어="">에서 강주(채림)의 각별한 아이사랑을 떠올려 보면 된다. </p>
아줌마들의 공동체가 형성된 또 하나의 이유는 남편들의 교대근무 때문이었다. 야근하게 되면 아침에 들어와 잠을 자게 되고 그 잠을 방해할 수 없어서(얼마나 힘들게 노동하는 지를 알기 때문에, 안쓰러워서) 집을 나가 주간 근무하는 아줌마네 집에 모여들게 되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아이들을 포대기에 업고 보행기에 태워서 공원을 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아줌마들은 같이 모여 밥도 해먹고 육아 경험을 공유하기도 한다. 씀씀이도 빤하고 어느 정도 공동체성에 의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질감, 공감
그 공동체는 어떤 힘이 있을까. 그녀들은 ‘노동자의 아내’, ‘아이의 엄마’ 말고 다른 어떤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건 순전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학생로서의 관심이고 난 또 다른 한 편 그녀들과 조주은의 이질감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시골에서 상경해서 유교적 전통에서 ‘희생’만을 딸에게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자라고 교육도 배제당하고 돈을 벌면서도 늘 통금시간에 쫓겼던 그녀들에게 결혼과 아이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낯선 땅에서 아이만이 야간 근무를 뛰러간 남편 대신이었을 그녀들에게 ‘자아성찰’이라던가 ‘자기계발’, ‘성취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조주은은 어떻게 보였을까. 조주은은 그 이질감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결국 뛰어넘어야 할 무엇으로 상정한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주인공과의 대화를 꺼리지 않지만 최소한 ‘아이’에 대한 ‘모성’만큼은 완벽하게 사수하려 한다. 거기서의 대화가 잘 안 되는 부분은 여성들의 문제인가, 페미니즘이 잘못 셋팅한 건가, 전술을 잘 못 쓴 건가?
엄청난 속도의 압축적 근대와 탈근대와 신자유주의가 마주친 순간에서 그녀들이 “살림이 뭐가 어려워. 제일 편하지. 난 집에서 노는 거 아니냐.”며 말하고 모성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순간(이를테면 아이가 엄마가 세련되지기를 바라기에 일하려는 아줌마). 조주은이 본 것은 무엇일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노동해방’을 외치는 노동운동가들이 여자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싫다며 집에서 밥하고 애 보라고 묶어대는 시선을 말할 때 나는 공감을 해야할까 아니면 돌파해야할 장애물로 생각하며 여성주의자들과 연대해야 할까.
바뀌면 좋겠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난 더 공감에 큰 비중이 갔다. “아니, 그 사람들을 어떻게 탓하냐”는 이야를 하고 싶었다. “왜, 그걸 여성이?”라고 하는 물음에 “좀 나아져야죠”라고 대답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밤새고 무기력하게 집에 들어오던 아빠를 떠올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야근을 마치고나서 아내랑 같이 자야 잠이 온다는 사내를 가르쳐서 혼자서도 잘 자게 만드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 지에 대해서 도대체 판단을 못 하겠다. 하지만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난 ‘입장’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익숙함’을 택할 것인가.
아이를 업고 다른 아이를 보행기에 태워 끌고다니다가 젖 먹일 공간을 찾아 공원을 떠도는 한 아이 엄마가 눈에 아른 거린다. 동시에 밤샘을 하고 문 열어 줄 아내를 떠올리며 웃음짓는 노동자도 떠올려 본다. 이게 이 둘의 문제일까. <사랑과 전쟁="">의 주제인가. 누구도 책임이 없는 데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고? </div>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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