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연재, 그리고 책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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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있을 때 실명으로 글을 쓸 수 없었다. 글을 쓰고 싶었고 내 이야기 말고 남의 이야기를 통해서 뭔가 메시지를 알레고리의 형태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글이 베베꼬이고 내 주장이라는 것들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썼던 책에 대한 이야기들은 잊어먹지 않고 언젠가 써먹기 위한 ‘독서노트’들이었다. 거기에 내 감정들이 이입된 ‘독서일기’이기도 했다. 누구에게 내 글을 보이려고 했던 것은 내가 갖고 있는 그놈의 오지랖과 붙임성 때문이었고 또 다른 한 편으로 지적 허영도 부정할 수가 없다. 싸이월드에서 하루에 2만 명이 들어왔던 그 날 블로그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알라딘 블로그와 싸이 블로그를 휴업하고 티스토리로 넘어왔다. 그러면서 ‘서평’이라는 걸 운동하듯이 써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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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은 내가 처음으로 데뷔한 매체이다. 제안을 받고 한동안 ‘습작’ 수준의 글들을 냈다. 그것들은 한 동안은 온라인에서, 그리고 또 한 동안은 오프라인 인쇄물로, 마지막 순간에는 온라인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매번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한 동안은 신분 때문에, 나중에는 타성 때문에 그냥 좀 어정쩡하게 자리보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28회로서 ‘헨드릭스의 책 읽기’가 끝났다. 마침 내 실명으로 글을 쓰겠다고 생각했는데 닉네임으로 시작된 글쓰기 하나가 마감되었다(다른 기고 문화매거진 <오늘>은 실명으로 연재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시작된 직업으로서의 공부 때문에 사실 한 동안 지지부진했고 글쓰기에 대해 고민이 좀 늘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아쉬움은 없고 굉장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은 ‘비즈니스 세계’의 글쓰기가 어때야 하는 지에 대해서 처음 알려준 매체이다. 이 보여준 의리를 잊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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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책을 매개로 한 글쓰기를 외부에 되도록 하지 않을 계획이다. 아직 마치지 못한 책의 이야기 연재가 있긴 한데 그것도 조만간 결론 내릴 예정이다. 한 동안은 책에 대한 글을 쓰는 것보다 좀 책을 더 읽어야 할 것 같고, 읽기보다 남의 말을 좀 들어야 할 것 같고, 듣는 것과 동시에 뭔가 ‘일’이라는 것들을 하는 시간이 내게는 필요하다. 내 공부의 순서를 좀 다시 구성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좀 스텝이 꼬인 듯한 업무의 위계들을 재편성할 필요를 느낀다. 일단 나를 좀 돌아볼 시간이 된 듯 하다. 내 글쓰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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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부에 있어서 방법론의 전환들을 좀 겪고 있는 편인데, 인류학이 주는 ‘근대’를 읽어내는 분석틀과, 다른 한 편에서 수학과 게임이론이 주는 formal theory의 분석들 이 두 가지를 익힐 필요를 느끼고 있다. 어떤 글을 읽을 때 그 글의 ‘문체’에 대한 것들만 읽던 시점이 있었다. 이제는 그 결론들의 ‘결’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논의들의 기본적인 구성과 전제조건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취하고 평가할 때가 된 것이다. 마냥 남의 글 좋다고 따라할 때가 아니다. 난 지금 ‘직업’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요즘 느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이렇다. 이를테면 수식을 글에 늘어놓는다고 그 텍스트의 저자가 ‘의도’가 없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이 헛소리인 것처럼, 텍스트가 굉장하게 풍부한 맥락을 느끼게 하는 문체와 레토릭과 사례들에 대한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내용을 풀어헤친다 해도 사실 알고보면 그 밑에 깔려있는 전제들이 ‘질적’이고 왠지 숫자로 환원될 수 없거나 수식에 의해 매개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논의의 기본 골자는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고, 거기에 저자(연구자)의 의도가 어떻게 깔려있는 지를 분석하는 것이 사회과학도의 ‘글 읽기’이고 ‘삶 읽기’가 될 것이다. 책을 쓸 생각으로 접근해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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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 조한 선생의 책과 글을 읽으면서 내 생애사를 쓰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에 대한 내 나름의 분석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계를 만들고 어떤 방법론 하나의 계보에 ‘묻어가기’는 날 죽이는 것일 수 있다. 내 나름의 탈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