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자발성,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결여한 ‘인간해방’은 가능한가 – 차문석 : 반노동의 유토피아

반노동의 유토피아10점
차문석 지음/박종철출판사

meteora님의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차문석 선생의 이야기를 읽었다. 2003년인가? 한국정치학회의 ‘복지국가 연구회’ 소속의 선생님들이 모여있었고, 나는 근로학생으로 거기에 앉아있었다. 성균관대의 마인섭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스핑 안델슨 이야기도 듣고 좀 독특한 자리였다. 학부생이 듣기엔 좀 버거운. 하지만 혼자 잘난 맛에 물들어 있던 당시에는 또 그게 하나의 멋이라고 새로운 이론가라면 하여간 사족을 못 쓰는 시절이긴 했다. 여튼 그 때 내가 엉겁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선생님들에게 하다가 들은 책이 차문석 선생의 <반노동의 유토피아="">였다. 아마 정치학회보에서 발견한 것 같은데, 그걸 어떤 선생에게 물었더니 이 책을 추천해준 것 같다.

그래서 며칠간 읽으면서 충격을 받고 ‘맑스-레닌주의자’라며 PD라고 말하다가 ‘-레닌’을 지워버렸다. 그냥 스탈린만 버리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지만, 국가를 통한 혁명은 이제 쫑 났구나 판단 끝내고. 그 다음날부터 또 다른 이론가를 찾았다. 그래서 네그리를 찾고 들뢰즈를 찾고 스피노자를 읽었다. 한 동안 또 하이에나처럼 날 좀 있어보이게 만들 이론가를 찾아다닌 거다. 어쨌거나 차문석의 글은 내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너무 평이하면서도 날카롭게 찌르는 맛이 있었다.

그 때의 리뷰를 찾아봤다.


20세기의 현실사회주의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인간의 해방인가? 아니면 맑스의 ‘고타 강령’에 나오는 이행의 법칙을 지키기 위한 교조적 해석이었는가?</p>

아니 차라리 이러한 물음들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데에서 오는 편향(서구의 우파 지식인들의
‘전체주의 국가’ 규정), 혹은 스탈린 주의가 다 망쳐 놓았다는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국가자본주의’ 규정등은 현실사회주의 국가를
이해하게 하는 데 전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하자, 현실사회주의가 인간해방의 이상을 포기했다면, 그것은 어떤 연유인가?

차문석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펴낸 ‘반노동의 유토피아’는 그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이다.

기존의 연구가 현실사회주의국가 들에 대한 대외관계 혹은 정치체제에 고착된 연구들이었다면, 차문석의 논의는 오히려 맑스의 그것 처럼, ‘노동’ 그리고 ‘생산체제’에 집중한다.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라는 부제에서 잘 보여지듯이, 그는 ‘생산관계’의 모순과 그것을 규정하는 ‘생산체제'(상부구조)의 양상을 통해서 현실사회주의를 파고 들어간다.

이진경의 <맑스주의와 근대성="">의 논의가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주체생산양식’에 주안점을 두고 ‘근대인’ 양산의
‘사회학적 분석’을 했다면, 차문석의 논의는 차분하게 ‘자본’에 나왔던 맑스의 담담하고 뚝심있는 분석을 다시 보여준다. </p>

20세기 볼셰비키 혁명으로 국가를 장악한 소련, 그리고 중국, 북한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 ‘사회주의’체제를 확립하지만 결국에는 몇가지의 차이를 빼고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서구 자본주의 팽창 단계에 1차 상품 수출국, 농업국,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 산업화의 이니셔티브를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 국가/외국자본의 후원 하에 수행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혁명 후 ‘맑스의 꿈’ (자유로운 인간들의 발전이 사회 발전의 토대가 되는…)을 이루려 할 때의 난제에 부딪히게 되었으며, 이들은 맑스의 ‘고타강령’의 고답적인 논의를 따라 생산수준을 창출하려 했다.

하지만 명제의 모순은 있다. PT독재가 사회주의 ‘국가’의 독재는 아니며, 생산의 사회화가 생산의 국유화는 아닌 것이다.
이들에게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도덕적 우월감’을 제공하였고, 그들에게 자본주의를 따라잡겠다는 근대적인 신념이 작용하였을 때,
‘사회주의 산업화’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산업화를 위하여 사회주의 노동의 ‘신화'(J. Calvin 류의 금욕적이고 노동숭배론적인)는 도입될 수밖에 없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노동자국가’를 위한 ‘노동’이 다시 강요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국가에서 “레닌과 뜨로츠끼 등 볼셰비끼들이 추진한 산업주의 국가화에 대대적으로 저항했던 세력은 노동자들이었다.”(p.43) 즉, 노동자 국가에서 그 국가에 칼을 꽂은 것은 노동자 국가였던 것이다.

이는 생산성의 마수가 사회주의를 삼켰을 때, 사회주의의 이상을 전유하려 계급(노동자 계급)에게 다시 억압기제로 작용하였다는 것을 볼 때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생산력주의, 산업주의가 ‘사회주의’를 삼켰을 때, 그것들은 과연 성공적으로 ‘사회주의 강성대국’으로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해방, 노동해방을 이룰 수 있었을 까?

모두다 알고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노동자 통제 => 기술자 => 당으로 전이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노동체제를 구축하고 생산성을 높이려 했지만, 실제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통제는 불가능했다.

노동자들의 유동은 극심하였고, 노동 규율은 작동하지 않았다. 매년 초과 달성을 위해서 낮은 목표를 할당받으려 애쓰는 공장장들, 그들과 흥정하는 간부들,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브로커들…..

또한 노동자들은 억압적으로 다가오는 국가의 원자화 전략에 의해서 조직되지 못했지만(노동조합의 국가화의 영향), 개개인의 태만
등을 통해서 ‘디오니소스적 노동’을 하게 된다. 사회주의 국가가 원했던 것은 ‘프로메테우스 적’인 강고한 의지(스따하노프 운동이
보여주듯)를 가진 생산력 향상의 전사들이 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된적은 거의 없고, 늘쌍 ‘형식주의 비판이 ‘형식주의” 식의
만성적인 타성에 찌들었고, 이는 결국 그들 체제의 한계와,, 다시 자본으로의 투항을 선언하게 만들었다.

현실사회주의의 노동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던 ‘시베리아 탄광의 강제 노동’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는 ‘태만’이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롭지도 않고, 결의 없이 무기력한 모습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 까? 계획이 문제였을까?

차문석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혁명적 열정, ‘사회주의적 인간’-적어도 연대성에 적합한 심성들을 표출시킬 수 있는-을
형성시키기 위한 계몽주의적 과제, 미래 사회를 열 수 있는 개방적 제도들 등 모든 가능태들은 생산성 중심주의의 깃발을 든
산업주의의 파시즘적 운동 에너지 속에서 사라졌다. 이 사회들의 해방적인 근대성은 모두 생산성에 종속되어 설명되었다”고 본다.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편견을 깨고, 오히려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결계를 다시 ‘현실사회주의’를 통해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또한 이 책은 국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능동적인 자발성’을 다시한번 역설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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