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예술판 읽기 – 강윤주 외, 한국의 예술 소비자, 룩스문디, 2008

한국의 예술 소비자8점
강윤주 외 지음/룩스문디(Lux Mundi)

문화예술의 사회학

요즘 <문화예술의 사회학="">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다. (2009/09/22 – [생각하기/출간계획 및 생각 다지기] – 문화예술의 사회학 – Arnold Hauser를 읽다 ①) 엄청나게 많이 ‘읽기’를 시키는 수업이다. 하지만 이상길 선생 본인이 꼼꼼하게 다 읽고서 오시기 때문에 어떻게 개겨볼 도리가 없다. 한동안 부르디외를 읽고 하워드 베커의 를 읽었다.딴 생각을 할 틈이 없을 만큼 빽빽한 수업이다. 몰입하지 않으면 남는게 없다. 늘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p>

어쨌거나 수업에서 <한국의 예술="" 소비자="">를 읽었다. 내 글들을 읽은 사람들은 좀 알지만 나는 경영학에 대해 굉장히 경계해왔다. 또 마찬가지로 정량 분석(Quantitive Analysis)에 대해서도 굉장히 의심이 많고 통계 안 돌리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많다. 요즘 그런 건 우석훈 선생을 만나서 좀 바뀌는 중이긴 한데. 경영학 자체에 대한 경계는 아직도 완전히 누그러지지 않았다. <한국의 예술="" 소비자="">는 지금 한국의 예술 시장이라는 것들이 어떤 상황으로 굴러가는 지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돕는다. </p>

마케팅의 눈이 등장한 이유

지금 예술계의 모든 사람들은 굉장히 긴장하고 소비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때 1%를 유지해오던 문화예산이 크게 변하지 않고 노무현 정부 때까지 유지되다가 1%의 저지선이 이명박 정부 때 붕괴했다. 유인촌이 “문화예술인” 어쩌고 해봐야 아무 쓸데 없는 소리임이 입증되는 증거인 거다. 어쨌거나 그 상황에서 ‘시장논리’라는 것들을 예술계의 기획자들과 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예전에도 물론 가난한 예술가들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피죽이라도 쑤어먹일 만큼의 지원을 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것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점차 가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던 L 프로듀서는 최근 영화 한 편 제작비가 얼마인지를 아냐고 물었었다. 난 한 20~30억 되지 않냐고
했다. 그건 노무현 때까지 그랬단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요즘 평균적인 영화 제작 단가는 10~15억이다. 그 돈이 줄어들면
어떻게 돈이 배분들까. 배우의 몸값을 줄일 수 있을까? 그건 거의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빠듯하게 예산을 쥐어짤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감독들이 자신이 원하는 배우를 선택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떨어지고 스타캐스팅이 가능한 것은 일부 몇 감독들과 그
제작사들 뿐이다(현재 한동안 주름잡았던 제작사 S도 문을 닫기 직전 상태다).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아마 ‘구조적 모순’을 발견하고 예산확보와 그것들을 풀어낼 ‘집합적 전략’을 고민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역시 마케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 대한 대안을 소비자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풀려한다. 그 차이가 느껴진다.

책의 책임 편집자인 강윤수는 원래 예술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글에서 가장 ‘전투적’인 마케터의 시선을 느끼게 된다. ‘문화예술 경영’을 주로 하는 대학원에 있어서 그럴까. 그녀는 “관객들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p.15)”에 소비자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정부의 공공 기금이나 개인 후원이 점점 줄어들기에 예술가와 예술 기관이 자생하고 독립할 필요성(p.15)”을 느낀다고 한다. 마케팅의 성공으로 돌파하는 경우들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데 사례는 잘 보이지 않는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일일까.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이라 할 수 있는 “되는 놈만 떡 하나 더 준다”에서 벗어나는 뭔가를 만들 수 있을까. “고객인 관객들의 필요와 욕구에 중점”(p.22)을 두고 홍보 콘셉트를 통해, 마케팅 전략을 통해 고객들이 작품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하”면 된다고 한다(p.23). 그러면 “예술 소비자들은 돈을 더 지불할 용의”가 있다니까(p.23). “고객의 숨은 욕구, 큰 대의에 기여했다는 뿌듯함을 적극적으로 활용”(p.23)하자고 말한다. 이는 “작품을 바라보는 고객의 관점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한다(p.23). 가능할까. 그리고 등장하는 이론이 매슬로우의 ‘욕구 계층 이론’이라는 것이 참 김을 빠지게 한다.

마케팅의 관점으로 ‘교육’을 보면 교육은 소비자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시장 창출’로 다가온다. “문화예술 교육은 새로운 예술 소비자를 창출해 내는데 있어 초석이 되는 요소”란다(p.29). 이런 시선들이 나에겐 굉장히 거슬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장점이 추락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여러명이 낸 책 치고 괜찮은 책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한 명의 에이스라도 있으면 좀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 다 두루두루
뭉게뭉게 하다가 끝나는 책이 많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에는 다행이 건질 논문들이 두세 개는 되는 것 같다. 5 장 중에 3
장 건지면 본 전 한 거다.

지금의 한국의 예술 실태

어쨌거나 이런 절박한(?) 인식에서 살겠다고 소비자를 이 책의 저자들은 살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문화예술의 주요 소비계층이다. 음악(여기선 음악 공연의 사례이다)의 경우 세대별로 30대(45%), 20대(30%), 40대(20%)순이다. 그리고 강남(53.2%). 강북(21.3%), 경기도(20.3%) 순으로 소비계층이 구획된다. 학력으로 하면 대졸(55%), 대학원 졸 이상(26%) 순이다. 대개 이런 문화상품의 소비군이 형성되면 마케터들의 눈은 30대의 높은 구매력에 호소할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20대에게 ‘호구 마케팅’을 통해서 알바비를 뜯어낼 수 있을 것이다. 40대는 10대들을 음악 공연 장으로 불러들임으로서 자연스레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클래식에서 10대가 가장 높은 비중의 소비계층이다. 이는 청소년 음악회 등 교육적 성격의 프로그램에 의해서 작동한다(p.82).</p>

</b>이러한 마케터들의 전략 속에서 배제될 계층과 계급도 빤하게 나온다. 하지만 일단 구매력을 기준으로 움직일 것이기 때문에 저소득층에게 돌아갈 것은 좀 없어 보인다. 결국 위에서 언급했던 지원금의 형태든 뭐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용관의 음악, 양성희의 영화, 오세곤의 연극, 정윤아의 미술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음악 시장은 저자가 ‘클래식’ 그리고 ‘공연’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좀 사정이 나아보였고, 미술도 ’emerging market’로 헤지펀드가 개입하는 큰 판이 되어버렸다.

최근 미술관들의 블록 버스터 전시와 비엔날레, 영리 시설인 갤러리의 아트페어와 경매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새로운 미술의 경향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 평가, 유통의 장이 움직이는 이야기들은 전혀 몰랐던 세계에 대해 개안을 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나도 기회가 된다면 독일의 1977년 프로젝트였던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Munster Skulptur Projekte 같은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이 함께 했던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참여해보고 싶다는 생각들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와 연극의 이야기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다. 영화는 침체가 이제 시작되었고 과잉 생산으로 인했던 자본의 누석 모순들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한동안 빡빡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상황 안에서 게토화되는 ‘독립영화’도 살려야 하고, 비평가와 대중들의 대화도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또 “대중은 수상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것처럼 기뻐하지만 그것을 곧 관람 행위로 연결시키지는 않는 이중성”에 대한 해소도 필요해 보인다. 그래도 여기는 돈이 좀 도는 동네이다.

오세곤의 연극의 이야기는 맘이 아파 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작품당 평균 제작비는 4~5천 만 원인데 평균 관객 수입은 1,200만 원”이다. 한 편 만들면 3000만원 이상 손해가 난다는 것이다. 그것들에 대해서 국가의 재정보조와 복권위원회의 수입을 통한 ‘사랑티켓’ 제도를 운영했었지만 결국 이명박 정부 이후 그 정책 취지는 ‘보통 사람들의 문화 향유권’에서 ‘빈곤층의 문화향유권’으로 바뀌면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상관없는 제도가 되어버렸다. 5~7천 원씩을 할인 받을 수 있었던 제도마저 없어지고 그 보조금도 없어짐에 따라 요즘 연극은 이제 “1,000만 원 미만”(p.200)의 ‘초저예산’ 연극도 나오기 시작한단다. 결국 개개인의 희생을 통해서 연극’판’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다. 한 명 한 명 굶더라도 보이는 미래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연극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죄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케팅 관점으로 접근하려는 저자도 결국에는 예술의 붕괴를 계속 걱정할 수밖에 없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저자가 그나마 내놓는 것이 대중에 대한 ‘교육’이라는 것이고 여기에는 나도 동의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한국연극협회, 민족극운동협의회, 교사연극협회, 한국연극학회, 한국연극교육학회, 한국교육연극학회, 한국대학연극학과교수협의회 등 7개 단체가 연대하여 한국연극교육위원회 결성 활동”(p.219)이 시작된 것에서 위안한다는 거다. 현장에서 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다음 논의를 위해서

요즘 ‘예술교육’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편인데 그것이 위에 언급한 강윤주의 “새로운 예술 소비자를 창출”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마케터들의 ‘호구 마케팅’에 놀아나지 않는 새로운 ‘공공 예술’의 ‘문화생산자’들이 많아지길 기대하기 때문에 난 예술 교육을 지지한다. 하지만 여하간 지금의 현실에서 예술계라는 곳이 어떤 논리에서 돌아가는 지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었고, 정보에 있어서 이 책은 굉장히 포괄적이고 이해를 돕는 구석이 많았다. 조금 더 현재 문화예술 시장의 실태를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어떤 ‘대안 공간’에 대한 밑그림도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 테니까.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