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트릭트 9 District 9 (2009)

디스트릭트 98점
네일 블롬캠프

디스트릭트 9
감독 닐 브롬캠프 (2009 / 미국)
출연 샬토 코플리, 윌리엄 앨런 영, 로버트 홉스, 케네스 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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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버그라는 상징 그리고 인종 분리의 장. 그곳에 나타나 20년동안 살아온 외계인. 영화는 끊임없는 은유를 한다. 외계인에게 식량을 파는 흑인들. 사람들에게 외계인들은 ‘위험한 존재’로 늘 호명되고, 그들의 행동 모두는 인간의 평온한 일상을 저해하는 ‘위협’들로 호명된다. 사실 알 만한 사람들에게 그들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이지만 끊임없이 호명해야할 대상인 거다. 이는 이주노동자를 호명하는 대한민국에서의 시선과 비슷하다. 이들은 공단지구에 고립되어있고, 농촌의 가부장제에 강하게 편입되어있지만 시민권을 온전히 얻지 못하고 늘 ‘불안한 기표’로 ‘외국인’은 떠다닌다.

외계인은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혐의 때문에 시민들에게 ‘위협’을 준다는 이유로 디스트릭트 9에서 디스트릭트 10으로 강제 이주될 처지에 놓인다. 이미 걸프 전 이후에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지만 그러한 전쟁같은 사태는 TV의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생중계된다. 코소보 사태, 9.11, 아프간 침공, 이라크 침공 모두 같은 양상이었다. ‘스펙타클’이 날아다닌다.

그 사태를 바라보는 순진해 보이는 비커스의 시선은 사실 날것 그대로 제국주의자가 식민지에서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외계인의 ‘모든 것’들을 낱낱이 설명한다. 그것은 이미 외계인이 현실적으로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철거가 시작되었고 그들의 강제이주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험한’ 상징으로 비춰줄 뿐이다. 외계인들과 인간들은 영화의 설명처럼 20년이나 그냥 저냥 같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아공에서 흑인들과 백인들은 그냥 저냥 살아왔다. 하지만 늘 필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적대’ 혹은 ‘위협’의 시선으로 비추어졌을 따름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서 쫓겨나는 것에 대한 저항을 ‘전복’으로 ‘반란’으로 묘사하는 시선에 익숙해졌을 따름이다.

사실 철거를 집행하는 다국적 군수업체 MNU가 원하는 것은 역시 이러한 ‘가상적’ 위협과 아무 상관없는 다른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익숙한 ‘음모론’의 클리셰일 수도 있다. 그 힘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환된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인류학, 문화 연구라는 것을 배우면서 바라본 <디스트릭트9>에는 볼 것이 참 많다. 백인 중산가정에서 남편 비커스는 일상적 ‘업무’로 추방 업무를 수행한다. 모처럼 찾아온 ‘승진’의 기회에서 침착하게 일을 처리할 따름이다. 그가 다쳤을 때 MNU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괴물>에서 송강호를 바라보는 시선과 동일하다. 순혈에서 빗겨나 ‘외계’와 더럽게 섞여버린 뮤턴트는 황색 언론에게 ‘창녀’를 바라보는 ‘순결한’ 시선에 의해 난타당하면서도 필요에 의해 그 ‘신체’는 실험실로 가버린다. 권력은 그를 내부로 던져버린다. 헐벗은 신체의 재판이다. </p>

아마 <디스트릭트9>은 <디스트릭트10> 혹은 다른 이름으로 시리즈물처럼 될 것 같다. 비커스와 외계인들은 ‘우정’과 ‘환대’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의 ‘모종의 계약’을 맺을 것인가. 다음 편도 기다려진다. 물론 안 나오면 할 수 없지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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