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이 읽는 방법, 장정일을 읽는 방법 – 장정일의 공부

장정일의 공부8점
장정일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M_장정일이 읽은 책|이제 |

박노자, 『당신들의 대한민국』, 한겨레출판

박노자,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한겨레출판

『월간 인물과 사상』, 2002년 12월호, 인물과사상사

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통나무

권인숙, 『대한민국은 군대다』, 청년사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고종석, 『서얼단상』, 개마고원

다치바나 다카시,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청어람미디어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청어람미디어

에스카르피, 『문학의 사회학』, 을유문화사

C.P. 스노, 『두 문화』, 민음사

에드워드 윌슨, 『통섭』, 사이언스북스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한길사

마르크 블로크,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 까치

이종오, 『난세를 평정하는 중국 통치학』, 효형출판

이탁오, 『분서』, 홍익출판사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까치

고미숙,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민족 · 섹슈얼리티 · 병리학』, 책세상

시마자키 도손, 『봄』, 소화

이토 세이, 『근대 일본인의 발상 형식』, 소화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민음사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솔

『배틀로열』, 대원씨아이

조지 오웰, 『1984』, 민음사

알로이스 그라이터, 『모차르트』, 삼호출판사

노베르트 엘리아스, 『모차르트』, 문학동네

폴 맥가, 『모차르트: 혁명의 서곡』, 책갈피

필립 솔레르스, 『모차르트 평전』, 효형출판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프레이저, 『황금가지』, 을유문화사

살림 미국 시리즈(001-010)

리처드 로티, 『미국 만들기』, 동문선

엠마뉘엘 토드, 『제국의 몰락』, 까치

새뮤얼 헌팅턴, 『문명의 충돌』, 김영사

쥐스탱 바이스, 『미국식 사회 모델』, 동문선

모리스 버만, 『미국 문화의 몰락』, 황금가지

안인희,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신대의 일상사』

귀도 크놉, 『히틀러의 뜻대로』, 울력

오인석, 『바이마르공화국의 역사』, 한울

슈테판 레버르트, 『나치의 자식들』, 사람과사람

전진성, 『보수 혁명: 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 책세상

전재호,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책세상

윤해동, 『식민지의 회색지대』, 역사비평사

윤해동, 『인텔리겐챠』, 푸른역사

랄프 쇤만, 『잔인한 이스라엘』, 미세기

키스 W. 휘틀럼,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이산

주겸지,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청계

J.J. 클라크, 『동양은 어떻게 서양을 계몽했는가』, 우물이 있는 집

존 M. 홉슨, 『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에코리브르

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이산

박태균, 『조봉암 연구』, 창작과비평사

여연구, 『나의 아버지 여운형』, 김영사

서중석, 『비극의 현대 지도자』,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역사비평사

박찬국, 『하이데거와 나치즘』, 문예출판사

요하힘 페스트, 『히틀러 평전』, 푸른숲 : 극우파 해석

구승회, 『논쟁 나치즘의 역사화』, 온누리

데이비드 웰시, 『독일 제3제국의 선전 정책』, 혜안

마리아 지그문트, 『히틀러의 여인들』, 청년정신

한스 노인치히, 『천재, 천재를 만나다』, 개마고원

『촘스키 9.11』, 김영사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시대의창

『권력과 테러』, 양철북

노엄 촘스키, 『불량 국가』, 두레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S. 허먼, 『여론 조작:매스미디어의 정치경제학』, 에코리브르

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 서당

신용구,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 뜨인돌

월터 C. 랑거, 『히틀러의 정신분석』, 솔

전인권, 『남자의 탄생』, 푸른숲

전인권, 『박정희 평전』, 이학사

마이클 파렌티, 『비주류 역사』, 녹두

리튼 스트래치, 『엘리자베스와 에섹스』, 나남출판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S. 츠바이크,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분도출판사

이인화, 『영원한 제국』, 세계사

이덕일, 『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김춘추에서 노무현까지』, 마리서사

박현모, 『정치가 정조』, 푸른역사

임지현 · 김용우 엮음, 『대중독재』, 책세상

K.R. 브래들리, 『로마제국의 노예와 주인』, 신서원

L. 샤피로, 『전체주의』, 삼성미술문화재단

마크 네오클레우스, 『파시즘』, 이후

이병천 엮음, 『개발독재와 박정희 시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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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까지

장정일을 잘 몰랐다. “쎈”놈을 읽으라는 우석훈 선생이 추천하는 저자가 몇 있다. 클래식으로는 에드워드 기번, 아서 코난 도일, 아이작 아시모프, 미셸 푸코, 폴 리쾨르 정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현대의 작가(이중에도 새로운 클래식들이 만들어졌다)들로는 움베르트 에코, 레모니 스니켓, 시오노 나나미, 그리고 장정일, 공지영, 최정규 정도가 있는 듯하다.

각각을 읽어야 하는 맥락들이 있다. 에드워드 기번과 아서 코난 도일을 읽은 후에 재해석들이 어떻게 에코와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이어지는지, 시오노 나나미가 어떻게 기번을 읽어내는 지 말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생각들이 다시금 뭉게뭉게 떠 다니게 된다.

그리고 장정일이 어떻게 공부했는 지를 잘 보면 길이 열린다고 우석훈 선생이 이야기했던 것이 생각나 간만의 휴가를 반납하고 도서관에서 장정일의 <공부>를 읽었다. </p>

장정일의 책 읽기</p>

</span>장정일은 중용을 피하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 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 그러던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 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p.5).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딱 적절한 이야기였다. 사실은 그래서 무식함을 덮는 것. 한국에서 흔히 강요되는 태도인데 그걸 깨고 나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다.

사실 그리고 장정일은 책이라도 안 읽었으면 벌써 죽었을 지 모른다. 그는 중졸이다. 한국 사회에서 한 명의 소설가로, 그리고 또 지식인으로 살 때 얼만큼의 무게를 느끼면서 살았을까. SKY 바깥에서 떤다고 종종 생각하는 내 엄살은 장정일 앞에서면 무릎을 꿇는게 당연하다. 노무현도 최소한 고졸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장정일의 책 읽기

각양 각색의 주제들이 늘어선다. 한 선으로 그의 이야기의 맥을 짚어볼 수 있을까? 아마 그건 지금 한국에 떠다니는 편린들의 구조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권위주의적인 일상들을 확인하기 위해 박노자와 권인숙을 읽고 대한민국에서의 군대와 일상에서의 파시즘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골격이라는 것의 시원을 찾다보니 송시열을 만나게 된다. 송시열을 읽으면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발견한다. 그의 공부는 이어져 있다. 이어져 있되 주제들을 점프해서 다니지 않는다. 깊고 넓게가 가능한 공부의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건 공부하다 막혔을 때 읽었을 다치바나 다카시의 ‘교양’에 대한 이야기 덕택일 것이다. 제너럴리스트가 갖춰야 할 교양. “모든 거대 조직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사람, 정책을 기획하는 사람,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 집행
부문의 상층부에 존재하는 기업의 운영자 등은 모두 제너럴리스트이다
. 기술 부문 출신의 대기업 사장이나 관청의 수장인 기술
관료들도 있지만 그들은 결코 스페셜리스트로서 최고의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다. 기술자이면서 경영에 대해서, 영업을 전개하는
전략에 대해서, 정치나 사회의 동향에 대해서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최고 자리에 앉을 수 없다(p.53).” 사실 장정일이 제너럴리스트를 해서 잘나가는 어떤 것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너럴리스트라는 스타일이 소설가에게 그야말로 절실하게 요긴한 것이기 때문에 장정일이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동의할 것이다.

노무현을 읽기 위해 이덕일의 책을 집어들고 이종오와 마키아벨리를 비교하게 된다. 통치자의 문제를 생각하다보면 민중을 또한 이해해야 하고 거기에서 장정일 역시 민족주의라는 대중의 열망을 떠올린다.

나는 물론이고 한국인의 대다수는 “일본의 메이지혁명은 태생부터 제국주의를 향해 있었다”는 식의 통념을
가지고 있거나 “끄저 일본 근대사는 제국주의, 대동아전쟁을 향해 달려갔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사실, 즉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구에 의해 강제 개항되고 피압박 상태로 시작한 일본이 대체 어떤 힘의 배치, 어떤 국제적 역학
관계 속에서 근대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가동시켰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떤 국면의 전환 속에서 제국주의로 전이되어 갔는가”를
파악해 보려고 들지 않는다(p.96).

민족주의 문제를 이야기하려면 또한 식민지 체제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일본을 이해해야 하기에 일본 문학을 읽고 당시 식민지 체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일제 시대에 대한 책을 읽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의 ‘독후감’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여기’를 이해하기 위한 독서

그리고 당시에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관점을 정하기 위한 책읽기도 이어진다. 네오콘을 이해하기 위해서 살림에서 나온 시리즈 10권을 주욱 읽는다거나, 한참 미국을 <제국>으로 보던 시각들의 책들을 살펴본다. 영화 <배틀로얄>을 보다가 소설 <배틀로얄>을 보면서 그 두 이야기를 엮어서 한 편의 독후감으로 만들기도 한다. 임지현이 <우리안의 파시즘=""> 이후에 이어서 한 <대중독재>에 대한 장정일에 대한 비판은 그가 책을 얼마나 엄밀하게 읽었나를 보여준다. </p>

‘대중독재론’이 나오기 전까지 통용된 전체주의의 개념이 추상적이었다는 저자의 견해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전체주의의 통치
기저가 온통 강제와 폭력 또는 세뇌와 선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잘못된 전제에 과도하게 매달렸기 때문이다. (……) 진짜
추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강제와 폭력을 전체주의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대중의 속설을 학문적인 규정으로 고정시켜 놓고, 거기에
기대어(반하여) 자발적인 협력과 동의라는 개념으로 전체주의를 새로 구성하려는 저자의 과장이다(p.365).

임지현은 한국민들이 박정희가 “반공을 국시로 한다”는 일성(소위 혁명 공약)을 발했을 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만
놓고 보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이승만의 극악스러운 반공 정책으로 인해 전 국민이 ‘레드 컴플렉스’라는
주술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고려치 않고 하는 말이다. 박정희의 일성 앞에 ‘입이라도 벙끗’하는 국민은 곧바로 ‘빨갱이’가 될
각오를 해야 했고, 빨갱이로 찍히는 것은 곧바로 죽음이었다(p.370).

지식인들의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이론들에 대한 비판은 임지현 뿐만 아니라 바그너와 게르만 전통을 통해 히틀러를 읽어 히틀러를 다시 살려내고 바그너를 다시 죽여낸 안인희에 대한 논박도 장정일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된다.

새로울 건 없지만 끈질긴 장정일의 독서

몇 가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재작년 쯤에 다치바나 다카시에 열광했던 내 모습을 떠올려보는 것이고, 그 때 숙지하려 했던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을 떠올려 본다. 같은 주제의 책을 100권 읽어 마스터하고 다른 주제로 확장해가는 독서. 장정일은 100권까지 그 주제를 읽어내는 것은 아니나 곁가지 주제들로 조금씩 옮겨가면서 지식의 ‘백과사전’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계속 공부하고 <독서일기>를 쓰다보면 베르나르 베르베르 식의 <상대적이면서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류의 이야기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새롭지 않으나 끈질김 때문에 장정일이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p>

그가 읽어내는 한국에 대한 축들 ‘권위주의’, ‘파시즘’, ‘식민지’, ‘민족주의’, ‘실패한 진보 정당의 50년'(=레드컴플렉스). 들을 잘 엮어 보면 하나의 거대한 한국 사회에 대한 스케치 한 편이 나온다. 이렇게 읽어내는 장정일은 이제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밑작업이 끝났음으로 본격적으로 쓸 수 있게되는 것이다. 한 권을 쓰기 위해, 한 주제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수 백권의 기초작업이 필요하다고 우석훈은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장정일은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장정일은 소설을 다시 세우기 위해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야기로 문학도 죽여버린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책읽기다. 살벌한 책읽기다.

내 책 읽기를 생각하게 된다. “에스카르피에 의하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이고 즐거움인 책 읽기의 대표적인 예는 문학 작품이다. 그것과 반대되는 수단으로써의
독서란 실용적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읽는 것으로, 어학을 배우기 위해서 읽는 어학 서적이나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 읽는 요리 책은
물론이고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 도서가 당연히 여기에 포함된다(p.48).” 종종 책을 읽다가 딜레탕트적인 독서를 하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 또 내가 원하는 주제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상관없이 읽어야 하는 책들이 생기게도 마련이다. 그럴 때에는 그래도 꼼꼼히 잘 읽어내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빨리 읽고 던져버리고 내 주제로 다시 몰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

공부하다 막힐 때 이제 장정일이 어떻게 읽었을 까도 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읽다가 집어던진 책에 대한 장정일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글렌 굴드에 매료된 바 있던 나는 우연히 미셸 슈나이더라는 프랑스인이 쓴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동문선, 2002)라는 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사 왔다. 하지만 몇 번이나 잘 읽어 보려고 시도했으나 아직까지 읽어 내지 못했다. 사변적이고 지엽적이며, 비체계적이고 언어유희적인 프랑스 작자들의 글쓰기에 질려 버린 것이다. 게다가 솔레르스가 누군가? 『텔켈』지의 수괴가 아닌가? 그래서 읽던 책을 잠시 덮고 네 권의 책 가운데 가장 오래 전에 쓰인 것부터 차례대로 읽기 시작했다(pp.138-139).

마지막으로 솔레르스를 읽었다. 그리고 알았다. 프랑스인의 글을 ‘메인 디쉬’로 여기고 읽으면 영양실조에 걸리기 좋으나, 디저트로 읽으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겁다는 것을!(p.150)

장정일의 <공부>를 읽고 있는 나를 관찰해보았다. 여기저기 다 밑줄 긋고 있지만 나중에 노트를 정리하면서 확인해 보니 난 장정일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장정일이 읽은 누군가의 내용에 대해 밑줄을 긋고 있었던 것이다. 장정일이 읽어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데 말이다. 어떤 자료든 내가 읽고 내가 검증을 해야한다. 자꾸 2차 인용에 의존하게 될 경우 내 식의 지식이라는 것은 남들의 생각의 프레임에 갖히게 되고 만다.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 말고는 다 믿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도 다시금 든다. </p>

처음 이 독후감을 쓰려고 할 때에는 책 안에 나왔던 2차 자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 했지만, 저자로 데뷔해서 책을 쓰기 위한 내 기록의 정리는 여기쯤이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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