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나이들(lads) vs 면돌이 –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읽다가

1. 휴가 기간의 포스팅 기간이 끝나서 한 동안 글을 올리는 것은 힘들 듯 하다. 바뻐 죽겠다. 잠깐 시간에 짬 내서 놀기도 해야하므로.</p>

2. 폴 윌리스의 『학교와 계급 재생산』을 읽고 있다. 1989년에 이 책이 번역 되었었다니 대단하다. 그 당시에는 근데 이런 이야기가 먹히진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그 때는 절대 다수의 사회과학서를 읽는 대학생들에게 절체 절명의 과제는 조국의 민주화 혹은 사회주의 혁명이었을 것이므로. 지금 와서는 좀 먹히는 이야기가 되었다. 1990년대 문화연구 그룹이 좀 잘 나가던 시절. 쉽게 말해 1980년대 PD 계열 빵잡이들에게 문화가 좀 팔려 생계를 해결해 주던 시절. 그 때는 좀 읽었을 것 같다.

이 책은 조한혜정 선생의 제자인 김찬호 선생(현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과 김영훈 선생(현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가 번역했다. 그 때 당시에는 둘 다 석사과정 대학원생이었을 것 같은데. 어쨌거나. 중대 문화연구 그룹이 아니라 연대에서 번역된 것이 흥미롭고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하자센터’와 ‘노리단’으로 이어지는 맥락과 이어지는 논의라고 볼 수도 있겠다.

3. 폴 윌리스는 제대로 영국 전통(E. P. Thomson, E. J. Hobesbawm, Raymond Williams, Stuart Hall)을 잇는 민중주의자로 보인다. 구조 제약에 대한 논의들이 좀 있어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Louis Althusser, Pierre Bourdieu 등의 강력한 구조에 대한 논의. 특희 과학주의에 영향을 받은 논의들이 ‘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허무주의로 갈 소지는 구조주의자들에게 더 많이 나타난다. 어차피 뭘 해도 자본주의와 전체주의적 억압체계는 박살나지 않는다. 나름의 재생산 방식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field)의 논리이든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SA:Ideological State Apparatus)의 억압기제이든 상관없다. 그 바깥을 사유하는 데에 한계들을 이미 설정해 놓았고 그 체계는 닫힌 시스템closed system이라고 볼 수 있다.

폴 윌리스는 CCCS(Centre of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의 경향을 따라 대중의 문화실천(이러한 표현은 어쩌면 Gramscian들의 헤게모니 투쟁과 자율주의자들의 역능-재활성화(revitalization)과 맞물려 있다)에 따라 ‘위반의 정치학’을 구성한다. 구조를 강화하는 힘은 통합하려하고, 거기에 저항하는 노동계급은 분화(권력으로 포획되지 않으려는 실천)하려 한다. 분화의 시도들은 늘 다시금 ‘비숙련 노동’으로 소환되어 자본의 잉여가치 증식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계급 자식들이 완전히 반학교 문화를 통해 익힌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자본과 구조화된 자본주의의 양상들이 노동계급의 공간을 분할하고 다시금 그들의 무기력을 유발하는 방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노동계급의 실천들이 있다는 것이다. 힘의 관계이기도 하고 프레임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 탈출구를 찾고 싶은 게 폴 윌리스의 기획이 아니었을까.

4. 그런 이론적인 논의들 말고 그냥 책에 나오는 싸나이들(lads)과 내 어릴 적의 면돌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학교에서 삥뜯고 갈구고 “여자 따먹었다”라는 무용담이 횡횡했던 내 남고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는 거다. 기집애처럼 가만히 앉아서 책읽거나 문제집 푸는 새끼들을 참지 못했던 면돌이 1진들과, 영국의 싸나이들. 나는 기집애 같은 ‘범생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1진도 아니었고, 늘 그 언저리에서 겉돌았다. 맞기 싫어서 1진 중에 ‘착한’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그들과 몇 가지 거래를 했었다. 내게 지식은 문제집에서 구축되는 것보다 일단 뭐든 많이 알아서 그들 앞에서 적당히 이빨 깔 수 있는 ‘실용적’인 것이어야 했다. 난 이미 학교 교육이 가르치는 모든 것이 실전용이라기 보다 입시용이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입시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았기 때문에 고3때 다시 그들의 세계와 척지지 않으면서 살살 피하곤 했다. 그 균형잡기 때문에 공부란 게 제대로 되진 않았지만.

어느 수업에서 잠을 자야 분필을 맞지 않고, 어떤 핑계를 대야 바로 조퇴를 할 수 있는 지를 연구했던 시절. 어느 술집에 가야 뺀찌를 먹지 않고 버티는 지를 연구했다. 서일대 앞은 언제나 우리 엉거주춤한 2진들의 소굴이었다. 1진들은 대놓고 사가정역 앞의 ‘요모조모’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그건 순전히 거기 알바들이 다 지들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좀 차분히 앉아서 생각을 해봐야 하고 친구들도 만나면 이야기가 다 재구성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시간이 없다.

Paul Will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