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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해제
지금 나는 외피을 뒤집어 쓰고 있는 지 모르겠다. 쎈 사람 둘과 있다보니 종종 내가 쎄졌다는 생각들을 하곤 한다. 착각이다. 분명 그건 차이가 있다. 알라딘 블로그를 뒤지다가 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을 읽는다. (이름값 효과에 대한 단상 – 얼그레이효과) 나는 사실 이름값 효과를 누리고 있으면서 내 이름이 상승했다는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지도 모르겠다. 조한혜정과 우석훈. 그들의 주변에 있다고 그걸로 내가 그들이 되는 게 아닌 건 확실한데 말이다. 우석훈 선생과 둘이 술을 마시다가 한 이야기가 있었다. “당신 연대 조한혜정 선생님과 나 만나서 ‘업혀가기 전략’쓰면 그냥 죽는거야!” 또 다시 우석훈을 동원해서 말하는 것이 그리 좋은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그 말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사실 종종 나에게는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없다. 아직 벼리는 중이다. 내게 아직 무장이 없다. 무기도 갑옷도 건틀렛도 없다. 잠깐 입었다고 착각하고 있을 것 같고, 잠시라도 홀로 남겨져 전장에 떨궈진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임금님 옷’을 입고 있는 순간들에 봉착하게 될 지 모른다. 나는 아직 누구처럼 두 권의 책을 낸 ’20대 저자’도 아닐분더러 누구에게 욕을 먹기보다는 아직 누구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도 아니다. “누규?”가 나에 대한 적절한 반응일 수 있다. 그냥 내 블로그에 놀러오는 사람들과 나 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친구가 있을 따름이다. 물론 그들이 소중하지만, 아직 ‘대의’를 가지고, 또 어떠한 ‘입장’에 대한 동의로 강하게 연대된 사람들은 내게 부족하다.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물론 내가 만난 좋은 스승들은 내게 ‘연대’의 손길은 늘 내밀어주고 있고 그것들이 내게 좋은 기회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과 상관없이 내 알맹이는 어디까지 가 있을까.
우석훈 곁에서 같이 붙어서 일을 하지 않게 되는 시점, 그리고 조한혜정 선생님의 곁에서 독립해야 하는 시점. 결국 ‘독립’의 문제이다. Independent. Dependent함에서 빠져나오기. 사실 나는 ‘비빌 언덕’에 너무 안주하고 있지 않았나. 천운이라면 천운인게 굉장한 사람들이 나를 끌어 안아 주고 있다는 것이지만 거기를 내가 ‘불모’의 지역으로 황폐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그들이 하는 일 수준에 안주하며 그들의 입장을 되뇌이며 내 자생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그리도 경계하던 무기력의 길에 나를 밀어넣는 것은 아닌가. 나는 나를 찬찬히 살펴보며 그 다음 길들을 열고 있었는가. 내가 오히려 길을 닫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석훈이 읽은 누구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의 작업하는 방식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고. 조한혜정이 뛴 운동과 그 성찰을 통한 통찰력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의 운동하는 방식과 거기서 어떻게 삶을 읽어내고 있는 가를 ‘익히’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지만 사실 그 개는 그 이후에 기껏해야 잡아먹히거나 총기를 잃은 순간 슬픔의 대상은 될 지언정 사람들에게 몇 대를 이어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풍월을 읊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댓거리를 하고 결기를 가지고 맞서야 하지 않나. 요즘 엄청나게 많은 ‘워너비’들을 만나고 ‘명사’들을 굉장히 많이 만난다. 분명 ‘기회’들은 엄청나게 열리고 있다. 난 그 기회들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있고 그들과 대할 때 나는 어떤 존재로 인지되고, 아니 그걸 떠나서 난 그들을 대할만 한가. 자괴감을 느끼려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어 최선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너무 팽팽한 것을 바라지 않지만, 또 느슨함에 그냥 물을 타고 있는 건 아닐까.
좀 더 엄밀하게 읽고 싶고, 장정일처럼 실전용 학문을 하고 싶고, 에코처럼 길이와 넓이와 부피를 가진 글쓰기를 ‘웃으면서 화내’듯이 쓰고 싶고,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다작을 하고 싶다. 그러면서 현실도 바꿔내고 싶다. 나는 어떤 글쓰기를, 글읽기를, 책읽기를, 책쓰기를 고민해야 하는가.
언제나 무장해제를 고민해야 한다. 곧 ‘무장’이라 생각되었던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므로.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라는 것이 언제나 열려있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