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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 자막이 들어가는 게 왜 문제적인가? – 문화인류학회 영상인류학 학생세션 후기
학술회의가 어떻게 진행되는 지에 대해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시절 굉장히 많은 선입견이 생겼다. 각이 잡혀있고 인사 열심히 하며, 교수는 박사를, 박사는 조교를, 조교는 학부생을 열심히 부리는(?) 군대형 시스템이 진행되던 그런 학술회의를 기억한다. 모든 행사가 끝나면 STAFF들의 위로차 뒷풀이가 진행되고 또 거기에서 군대형 회식 자리가 재현되곤 했다. 폭탄을 돌리고 마시고 각을 잡으며 안 취한척하고 화장실로 가서 토하고 돌아오는 그런 술자리. 정말 짜증났었다.
2009년 가을 한국 문화인류학회가 진행중이다. 11월 6일부터 7일까지로 진행된다.
문화인류학회에 참가중이다. 여기는 그러한 ‘꼰대’들의 문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기대가 좀 되었다. 조한을 믿었기 때문이고 김현미 선생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마침 집에 좀 일이 있어서(그건 다른 포스팅에서 이야기하겠다) 오후에야 참가할 수 있었다. <영상 에스노그래피="" 상="">이라고 하여 학생들이 만든 영상들 11편을 선정해서 관람하고 그 중에서 관객들의 투표를 통해서 시상하는 그러한 프로그램이었다. 11편을 다 연속으로 대략 10분씩 보면 지연되는 시간을 포함해서 2시간은 넘게 걸리는 그러한 긴 세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최우수상 후보작 3편만 먼저 보고 그 중에서 순서대로 시상을 하는 그러한 구도였다. 3편을 보고 관객과 제작자와의 대화가 진행되고 그 후에 투표하는 그런 순서였다.영상>
정진웅 선생의 진행으로 조한의 덧붙이는 말과 함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첫 편이었던 <마법의 주문="">은 수능 고사장(?)에서 아이들을 응원하고 대기실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는 엄마와 아빠들의 모습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마법의 주문”(magical spell)을 믿고 있는 착한 아이들의 세계와 그 바깥의 “anti-magical spell”의 세계 바깥의 아이들의 세상을 보여준다. 담배피면서 노상까기(길에서 죽떄리면서 놀기)와 침뱉기가 취미이고 PC방에서 밤새며 노는 학교 짤린 아이들의 세상의 대비.마법의>
그리고 내게 놀라운 영상은 인천외고를 찍은 채종민이라는 아이의 <무엇이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였다. 사실 주제 자체는 그리 놀랍진 않았다. 외고의 아이들도 ‘놀이’에 대한 갈증이 있고 그것들을 보여주는 시도들과 그들의 유치함을 보여주는 시도들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사이로 파고들어가서 ‘뻘쭘함’을 완전히 극복하고 영상의 대상이 되었던 친구들과 편안하게 수다를 푸는 제작자 채종민이 대단해 보였다. 수능이 1주일도 채남지 않은 상황에서 인류학회 자리로 나와서 함께 이야기하는 그 아이의 재기발랄함이 돋보였다.무엇이>
마지막으로 김문기와 이종훈이라는 연대 신방과/신학과 학생이 만든(누가 신학과이고 누가 신방과인지는 모르겠다) <다소 어색하지만="" 그래도="" 다큐="">라는 작품을 봤는데. 병맛에 “이건 뭥미?’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다큐였다. 다들 모두 꿈을 찾아 떠나고 있을 것이라는. 거기에는 ‘사회’는 없고 ‘연대생의 알 수 없는 자신감’은 좀 보였고 난 좀 졸 수밖에 없었다. 7분 쯤밖에 상영을 안했지만 나는 그 7분이 7년쯤으로 느껴졌다.다소>
3분간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정진웅 선생의 진행으로 여러가지 질문과 코멘트들이 와갔다. 그러는 도중 어떤 대학원생이 코멘트 하나를 날렸고 좀 논쟁거리가 되었다. “제가 보기에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영상은 요즘 예능프로그램이 주로 쓰는 자막을 이용해서 빵 터뜨리는 방법을 많이 쓰고 있는데, 너무 재미를 의식하는 자막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나요?”라는 요지였다. 거기에 대해 채종민은 “일단 별 문제가 없는 것 같고, 나중에 영상인류학을 좀 배워보고 문제 있으면 바꿔볼게요.”라고 말해 관중을 웃겼다. 첫 번째 팀의 주장은 기억에 남지 않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거기에 대해서 나도 좀 개입을 해서 논쟁을 해보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어디서 뺨 맞고 어디가서 화풀이 한다고, 난 현장에서 말 못하고 블로그에서라도 화풀이를 해봐야겠다.
이를테면 영상이 텍스트일 때, 글도 텍스트다. 영상이 제작자의 의도처럼 안 보여지듯, 글도 작가의 의도처럼 보여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 질문을 한 대학원생은 영상을 자막이 가린다고 했는데, 글쎄. 어차피 자막도 자막을 넣은 사람의 맘대로 관객이 읽어주지는 않는다. 자막이 외국어도 아님에 입히고 있다는 것은 한 차원의 텍스트가 덧대어져 영상이라는 차원과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순전히 자막 때문에 빵 터지는 것도 아니고 영상 때문에 빵 터지는 것도 아니다. 상호작용 때문에 웃길 수도 있고, 하나 하나 재미있어도 엇갈리면 묘하게 재미없을 수도 있다. 자막이 오로지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인생극장의 자막이 빵 터뜨리지는 않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TV를 바보통이라고 말하면서 TV보지 말자고 말했던 초창기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마찬가지다. TV가 바보들(대중)을 더 바보로 만든다는 건데, 여기에는 영상매체가 활자매체보다 후지다는 선입견이 깔려있다. 이런 말은 채플린 이후로 사라졌다. 난 자막을 띄워서 대중들이 영상의 제대로 된 맥락을 못 읽어낸다는 말에서 그러한 징후를 발견한다. 대중을 바보로 보나. 사람들은 새로운 매체가 나오면 한 동안 열광해서 그에 대해 적절한 비판을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곧 질린다. 똑같은 장르, 똑같은 관습적 표현에 곧 질린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좀 나은 것들을 선별할 수 있게 된다. ‘비평’이 곧 시작되는 거다. 무한도전이나 여러가지 예능 버라이어티 쇼의 초창기 시절 사람들은 막 웃으면서 도취되었을 수도 있지만 얼마 지나서 똑같은 장르와 관습적 표현을 쓰다보면 시청률은 곤두박질을 친다. 결국 또 새로운 방식들을 제작자는 만들 수밖에 없다.
지금은 자막이 들어가는 게 유행일 수 있지만, 다시 나중에는 자막이 없어질 수도 있고 다른 방식의 자막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자막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대중에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참조점들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닐까.
난 그런 인식 밑에 깔려있는 이상한 엘리트주의를 발견한다. 영상에 자막이 들어가는 게 도대체 뭐이 문제가 되나. 뭬야? 아. 병맛. “재미”를 폄하하려면 일단 무한도전 만큼 웃기면서도 용산참사를 찾아내는 시도를 한 번 해 보던가. 김태호만큼 제발 좀 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