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좌빨들의 시대는 안 왔거든? – 이광일,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2008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10점
이광일 지음/메이데이

우리나라에서 좌빨(좌파 빨갱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누굴 찍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말을 모두 다 피해왔다는 것이다. “나는 빨갱이거든?”하고 맞장을 뜨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조건도 부재해왔다. “너 빨갱이지?”하는 언명만 남았다. 항상 좌빨은 1인칭 주어가 없다. 너 아니면 그들이다.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이 70%이던 시절은 콩사탕을 때려잡자는 이승만의 구호와 함께 사라졌고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던 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좌빨이라는 말에 모두들 수동적으로 대응하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지칭하는 ‘좌빨’과 상관없는 진짜 좌파가 있었냐 없었냐의 문제는 아무도 잘 이야기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난 “너 좌빨이지?”라는 말에 대한 대답으로 요즘 사람을 편을 갈라보곤 한다. 난 이 말에 재수없게 대답하는 인간들을 잊을 수가 없다. 주사파는 “우리는 애국청년이거든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국가보안법이 주사파들을 보위해 주고 있었다. 이적단체 지정받아서 수배받은 이들의 구체적 고통들에 공감하기도 전에 완장질을 해대면서 다른 정파에 대해서 도덕적 우위를 누리려는 새퀴들을 보곤 했다. 생각해보면 한총련 대의원에 얼레벌레 끼게 되었던 단과대 이상 학생회들도 ‘한총련 탈퇴서’를 쓰진 않았다. 그들도 수배자였다. 국가보안법과 주사파의 적대적 공존. 그 덕택에 학교에서 좌파들은 다 죽었다. 운동권에 대해 특별하게 관심없는 이들에게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는 구분되지 않았으니까.

다른 한 편 2007년 말,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 경선이 떠오른다. 심상정이 1차 투표에서 결선에 올라갔던 순간에 난 환호하고 여기저기 블로그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석훈의 블로그에서 희한한 이야기를 듣는다. “씁쓸해서 소주 마실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노회찬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나? 이광일의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를 읽으면서 이제사 공감하게 된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학위논문을 읽고 울어본 적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울었다. 피를 토하면서 글 쓰는 게 보인 것도 처음이다. 여전히 좌파의 정체성을 지켜가는 한 운동가출신 학자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좌파. 이광일은 ‘좌파’라는 말을 논문을 쓸 때에도 쓰기 어려웠나 보다. 구태여 ‘급진노동운동’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좌파’라고 딱지 붙으면 다른 이야기가 불가능해서 그랬을까. </p>

이광일의 좌파운동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해온다. 계속 들려온다. 델리스파이스의 <차우차우>처럼. “너의 목소리가 들려.” </p>

내 정치학에 대한 이해는(2008/01/02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 프롤로그 – 1학년
2008/01/02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 시도들과 실패들(2학년 – 1)(2006년 글)
2008/01/02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 제2대학 (2학년 – 2)(2006년 글)
2008/01/02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 수업에서의 정치학 (2006년 글)
2008/01/02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왜 정치학을 공부했을까? – 즐겁게 사유하기(한 가지의 단서)
) 최장집을 온전히 분리하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맑스가 가장 원류였고 그람시가 그 뒤에 네그리가 내 말빨의 원천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제도권 학문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최장집이었다.

최장집의 ‘노동의 시민권’을 이야기할 때 난 뻑갔었다. 그리고 그의 민주화 국면에서 운동권이 삽질해서 민주화가 변형주의로 엎어지고 노태우를 만들었다고 말할 때 난 심히 공감했었다. 뭔가 불편한(운동권이 다 같지는 않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으므로) 구석은 있었지만 참으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광일의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는가="">를 읽으면서 그 깨림한 구석을 깨우쳤다. 최장집은 마치 좌파가 87년 대중운동의 주도권을 쥔 것처럼 전제하고 좌파가 뻘짓 한 것 마냥 비판을 한 것이다. 허수아비 비판을 했지만, 이 말들은 좌파들을 고립시키고 운동판에서 싹을 잘라버렸다. 안 그래도 소련도 망하고 사회주의하면 학을 떼던 판에 좌파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아 그렇다. 좌파는 한 번도 대중을 지도해 본 적이 없다.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런 식의 구라는 어제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비판적 지지의 악몽(김대중-노무현을 찍으라는. 그리고 선택지를 김영삼 김대중의 단일화냐 김대중의 비판적 지지로만 한정짓는 프레임 작동). 늘 급진주의자를 말썽스럽다고, 대오단결과 통일을 저해한다고 지랄하는 대중추수주의. 주사파들의 우파사랑과 나라사랑. 여전하다. </p>

그들은 70년대 노동운동이 크리스찬 아카데미와 산업사회선교회의 기독교의 품에서 재야 세력과 ‘자유주의적’으로, 그리고 고립된 섬들로 운동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맑스주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80년대에 등장했다. 그들은 대학생이었지만 ‘지식인으로서 지지’하는 노동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현장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 그리고 수도권 공단 등지에서 연대사업들을 하고 85년 구로연대파업을 통해서 ‘정치적 행위’들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행위는 한 순간에 뻥하고 터진 게 아니라 80년 광주 이후 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왔던 ‘그들’의 폭발이었던 거다.

20대 초반에서 30대에 이르는 젊은 좌파들은 어떻게 현장에서 살아남았을까. 좌파가 순전히 잘 한 건 아니다. 그들은 노선의 갈등이 있으면 사투(사상투쟁)를 벌이고 조직을 찢곤 하고 경합을 벌이면
등을 돌리곤 했다. 물론 이건 내가 겪은 마지막 PD(전학협-사회당학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전노운협에서 전국노련을
만들면서 튀어나온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 정당사업(한사노당-노정추-한노당추진위)를 하면서 동시에 절대로 끊지 않았어야할 노동운동과의 끊어짐(이걸
결별이라 말하기는 어렵다)은 그들에게 마지막 주어졌던 현장과의 직접 연관을 끊어놓는 계기로 작용했을 수 있다(물론 이
순간에도 현장에 남아있던 인민노련의 조직원들이 있다). 덕택에 전노협과 관계가 끊기고, 민주노총의 급진화를 할 수 있던 순간도
잃어버렸다.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으로 진행된 순간이 너무 아프다.

이재영과 우석훈은 인민노련이 전망했던 세계가 펼쳐졌다고 했었는데, 일단 진보정당 운동이라는 방향이 맞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또한 민주화라는 국면들이 만들어낼 효과에 대한 인민노련의 예측들도 맞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중을 너무 잘 몰랐다.
신지호의 92년 총선 이후의 전망이 맞는 부분이 있다. 그들은 너무 만만하게 현실정치를 봤다. 민중당 당권파보다 자기들이 더
선명하므로 더 많이 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거기에 혁명의 파토스가 있다. 인민노련이 있다. 좌파 노동운동이 있다. 인민노련은 억울하다. 좌파는 억울하다. 그들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가버린 한 다발의 꽃이다. “당시 이들 급진 노동운동만이 기존 자본주의적 사회정치체제를 문제시하는 발상을
제시하고 실천하는 유일한 세력이었기 때문이다”(p.44). 주사파의 뻘짓을 여기서 일일히 다 언급하기엔 내 입이 아프다. 그들은 진정 사회주의를 꿈꿨고 그를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현실에 발을 딛고 땅에서 나오는 이론을 가지고 투쟁과 혁명을 기획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법정에서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민노련-노동계급(그 <사사방>의 이진경의 노동계급)-삼민이 모여서 한사노당(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을 결의하던 순간. 그리고 인민노련이 전국조직이 되고 심지호가 울산으로 파견을 나가던 순간. 또 전성의 <노동자의 길="">의 읽으면서 혁명을 결의하던 어떤 대학생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책에 언급된 여러 운동가들의 현재도 떠올려 본다. </p>

물론 세상은 변했다. 그들 좌파의 기획(구좌파-맑스레닌주의)이 지금의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세상에 모순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로 해설될 수 없이 복잡해졌다. 또한 경제와 정치가, 노동과 정치가 맞물리는 맥락도 변했고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전선들은 숱하게 늘어났다. 아니 전선의 의미 자체가 문제화되는 상황이다. 젠더의 문제가 폭발했고, 생태의 문제가 폭발했고, ‘신좌파’적인 이슈들이 중요해졌다. 인민노련의 노선을, 좌파의 노선을 지금 추동할 수 없다(물론 인민노련의 노선이 좌파 전체의 노선은 아니다. 여기에는 논쟁점이 많다.). 하지만 그 당시 맥락에서의 좌파의 노선을 본다면 그들의 혁명에 대한 파토스를 어찌 부인할 수 있나.

이제 인민노련에 대한 작업들이 점점 전개될 계획이다. 방학이 되면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다. 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는데 이광일의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를 읽으면서 길을 찾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p>

아, 처음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좌파 빨갱이의 시대는 한국에서 열린 적이 없다. 노동운동에서도 주류였던 적이 없고, 대중운동(87년 6월 항쟁)에서도 헌신적으로 뛰었지만 그들은 주류가 아니었다. 우파들은 늘 좌파 빨갱이에 대한 ‘겁주기’를 가지고 장사를 했고 그들을 부풀려 말했지만 그게 작동한 건 순전히 좌파 빨갱이들이 힘을 못 썼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대중들에게 힘을 썼었다면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만하게 언론에서 다루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좌파들의 전술상의 무능함도 있었을 것이고 무작정 때려잡았던 공안의 시대도 있었을 것이고 자본주의의 변화도 있었을 것이다. 제약조건과 선택의 오류와 한계들이 그들을 쇠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인식이 틀린 것은 아니다.

“자본과 공개적 독재체제에 의해 증폭된 모순이 최소민주주의(절차적 민주주의 – 인용자)를 목표로 하는 자유주의적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의해서는 극복될 수 없다는 점에 착목하고 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정립하고 실천한 목적의식적인 조직적 운동었기 때문이다”(pp.388-389).

난 그 좌빨의 시대를 다시 열고 싶다. 노무현을 좌파빨갱이라고 말하면서 좌파라는 말을 쉽게 던지는 그들에게 진짜 좌빨의 시대가 그들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시대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좌파라는 말이 오히려 온당하게 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올 거다. 비겁한 주사파들의 “우리는 애국청년이거든요?” 이따위 소리도 좀 안 들을 수 있고. 좌파의 시대는 온다. 안 오면 만들면 된다.

뱀다리:
이광일은 맑스주의 경제학을 일궜던 일곡 유인호 선생의 뜻을 기리는 제 2회 일곡학술상을 수상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과거 좌파가 민중지향성을 지닌 ‘비판적
자유주의세력’(개혁자유주의세력)이 행사하는 헤게모니의 반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있다기보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바로 ‘좌파의 언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론, 실천의 수준에서 지난 시기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헌신적인 삶의 궤적을 기록해 온 세력이 바로 좌파라는,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좌파에 대해 온갖 데마고기가 난무하고 있는 지금도 자본과 권력에 눌린 자들의 옆에 항상 ‘좌파’가 함께 숨 쉬고 있는 현실은
이를 증명합니다.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10점
이광일 지음/메이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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