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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을 당신들이 했다고? 아니거든요? – 김원, 87년 6월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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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항쟁 – ![]() 김원 지음/책세상 |
2001년. 김원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읽으면서 내 주위를 감싸고있던 운동하던 인간들을 사소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문화가 상대화되었고 그들이 어떤 세상에 살았는 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2002년 군대에 가던 2001년 단과대 학생회장에게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줬다. 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후의 예우였다. 하지만 그 책을 하찮게 생각했다. 그와 같이 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내 고민들을 다 보여주었을 때 그는 쌩깠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이할 수 없었다.</p>
87년의 6월 항쟁에 대한 평가들은 언제나 ‘승리’에 대한 것들이 주류였다. 언젠가 87년 6월 항쟁에서 주사NL의 ‘서대협’과 ‘전대협’의 행태들에 대한 어떤 문건을 읽은 적이 있다. 소부르주아적인 그들은 늘 정치가 확장되는 순간을 경계했고, 중산층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선에서 운동을 막아왔다고. 동지들이 피터지는 순간에 그들은 ‘비폭력’을 외치며 고립시켰다고. 물론 그 문건들은 PD들의 자기 기록들이었고 나는 그 문건들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주사파에 대해 적개시하는 마음은 커졌지만.
하지만 그 배경에 뭐가 깔려있었는 지를 생각해 본 적은 별로없다. 이번에 인민노련의 기억들을 재구성하기 위해 자료를 찾았기 때문에 본 것이다. 난 87년 6월 항쟁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중산층의 혁명’이라는 것에는 늘 동의를 했고, 87년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더 의미가 있다는 생각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다 틀렸다. 87년 6월 항쟁에는 ‘급진적’인 다른 역사가 있었다. 인천/부평에서는 ‘해방구’가 열렸고, 거기에서 화이트 칼라 ‘넥타이 부대’는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들 하는 스타일대로 나갔다가는 전경한테 터져죽기 십상이었다. 급진화된 투쟁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양상에서 그들은 싸웠고 이겼다. 그들을 ’87년 6월 항쟁’ 담론이 배제했을 뿐이다. 부산에서도 마찬가지로 투석전이 벌어졌고 자칫하면 광주와 같은 유혈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시민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그리고 노동자/빈민 들이 주도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서울은 광주가 아니고 부산이 아니고 인천이 아니다. 서울에서 늘 평화로운 집회가 가능했던 것은(2008년이 빡세다고? 그건 우리가 빡센 상황을 잊고 살아서 다시 놀랬을 따름일 수도 있다) 함부로 군대를 동원할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방은 늘 잊혀져 있고 중앙으로 모든 것이 몰려있는 한국에서 지방에서는 오히려 날선 공권력의 더 폭력적인 진압과 시민들의 더 격렬한 저항이 상승효과를 낼 수도 있다. 만약 현대중공업이 서울 중구에 있었다면 골리압 파업과는 다른 양상으로 펼쳐졌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상도가 요새 수구 꼴통의 아성인 것처럼 되었지만, 87년 경찰서장이 제발 전경들 때리지 마이크로 방송하던, 제발 방패랑 곤봉은 빼앗아 가지 말라고 했던 곳이 부산이다.
어쨌거나 문제는 전대협의 역사가 80년대 학생운동의 주류 담론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중산층 운동이 87년을 대표하는 운동이 되었다는 것, 노동운동의 주류가 대중조합주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틈새를 볼 여지가 없는 것이다.
슬프다. 80년대를 ‘승리’로 표현하고 만세 삼창하며 그 ‘승리’를 팔아 ‘승리’했던 인간들 뒤에 켜켜이 ‘아픔’과 상실을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야 했던 구체적 인간들의 경험이여.
386 주류, 전대협, 국본. 니들이 다 했다고? 공간을 연 것은 급진 운동이었다. 그리고 억눌려있던 노동자들과 빈민들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국본만 따라가면 될 줄 알고 잠시 참았지만 그게 개뻥인 줄 알았을 때 7~9월의 투쟁의 판을 깐 거다. 그리고 그 때 국본과 전대협은 ‘평화투쟁’ 어쩌고 하면서 쌩깐거고. 늘 협상만 생각하던 국본과 서대협 뒤에서 급진주의자들은 5.3 인천 항쟁을 통해서, 그리고 노동자들과 같이 살면서 ‘노동자’로서 문을 열었다. 좌파들이 연거다. 끝까지 주도는 못했지만. 마치 2008년의 촛불 시위를 고교생들이 다 열고 386이 껴서 결국 범대위의 얼치기 대의 정치가 말아먹은 것처럼. 어른한테 인사해야 하고 어른 발언을 다 모여서 훈화말씀처럼 듣는 것에 익숙한 점잖은 인간들은 길을 열어본 적이 없다. 늘 그들은 열린 길에서 거드름이나 피고 잘난척이나 했을 따름이다.
</span>“왜 노동자 운동은 87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까? 그리고 1986년 말까지만 해도 급격하게 위축되었던 학생 운동이 87년 6월에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격렬한 가두시위가 벌어진 부산의 경험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p.45)
</span>“나는 ‘역사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즉 역사는 사실의 실증적 재현에 국한될 수 없다. 역사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2008년 촛불을 보면서 냉정하게 언제 국가가 변해본 적이 있냐고. 자본주의 국가는 늘 독재였음을. 즉 어떤 차이와 동일함이 있는 지를 냉정하게 보고는 있는 지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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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이 그 빈도와 강도에서 이전 정권에 비해 훨씬 강력해졌다는 사실. 이전 정권에서도 사회 운동 등에 대한 탄압은
그가 있던 문화연구 ‘시월’이 알고 봤더니 작년에 문을 닫았단다. 마음이 안 좋다. 뭘 할 만하면 못하게 하냐. 단순히 이명박 정권만의 문제인가.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정치학을 김원이 하고 있었다. 정치인류학이라고 꼭 이름 붙여야 하나? 난 이런 정치학을 하고 싶었던 건데. 난 이런 걸 정치학이라는 분과에서 하기 어려웠다. 손호철 선생을 찾아갔었다면 좀 다른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었을까? 이랬거나 저랬거나 난 지금 문화연구에 만족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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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은 적절히 그 문제에 개입한다.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에서는 그의 억울함이 묻어났었으나, <87년 6월 항쟁>에서는 이제 툭 털고 다시 다른 ‘상상력의 역사’를 제안할 정도로 침착해졌고, 이제는 위트있게 지를 수도 있게 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임용되어서 그럴까? 어쨌거나. 이광일은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에서 억울한 심정이 모든 장에서 묻어나는데 김원은 이제 좀 툭 턴것 같다. 집요하게 지적할 수 있을 것만 같다.</p>
행위자들이 만들어내는 사실과 역사적 상상력이 결합된 산물이다”(p.15). “역사는 잘 이어지지 않는 맥락과 맥락을 상상력이 결합해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반드시 ‘종이 문서’로 쓰인 것만이 역사적 사실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문서 사료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정작 증거와 증거, 역사의 행위자와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이어주는 역사적 상상력을 가로 막을 수 있다”(p.16).
예전에는 그의 글도 빡빡하고 읽기 어려운(그래도 문화인류학적 글쓰기를 하기 때문에 읽기 상대적으로 쉬웠으나) 문투였는데. 이제는 읽기 편해졌다. 대중저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 인식은 더 정교해졌고 어디를 쳐야하는 지 잘 아는 것만 같다.</p>
존재했고, 억압적 국가 기구도 작동했다. 이랜드 노동자 투쟁으로 상징되는 불안정 노동, 구조 조정, 노사 관계 로드맵 등을
떠올려보라. 다만 우리는 너무 쉽게 잊을 뿐이다. 물론 억압적 국가 기구 작동이 이전보다 노골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현상들
때문에 현재 대립 구도를 독재-민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는 ‘대안’과 연관된 문제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독재를
부르는 순간 그 대안은 민주주의가 되고, 대안 담론 수준에서 민주주의는 정상적인 정당 정치, 소통의 원활 등으로
협소화된다”(p.182).
마지막으로. 80년대에 대한 기억은 노동자들과 학생이 다르고, 학생들 사이에도 심각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모르고 주류의 기억만을 기억할 때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의 상처에 공감(empathy)하지 못한다. 문화기술지를 쓰면서, 구술사를 쓰면서 쓰는 사람이 변하고 읽는 사람이 변한다. 우리는 서로 구성되는 우리의 기록들을 기억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p>
87년 6월 항쟁 –
김원 지음/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