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 경험의 재구성 – 김원,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10점
김원/이후


2009/11/15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6월 항쟁을 당신들이 했다고? 아니거든요? – 김원, 87년 6월 항쟁

2009/11/11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진짜 좌빨들의 시대는 안 왔거든? – 이광일,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2008
2009/10/22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대중의 자발성,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결여한 ‘인간해방’은 가능한가 – 차문석 : 반노동의 유토피아
2009/08/24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데뷰 : 우석훈과의 공저 작업 – 인민노련

386세대라는 말은 이제 어떤 지위가 되었을까. 노무현 정권 때까지는 정권 주위에 포진하는 하나의 거대한 힘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신격화되었고 마치 ‘민주화’라는 거대한 넘을 수 없는 산을 만든 것같은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어떨까.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의 대학교 수강신청을 대신해주고 10대 아이들을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여기는 ‘매니저 맘’의 세대가 되었고(여기에는 386 운동권 출신의 입시 컨설턴트) 그들이 막연히 진보라고 상정되는 것의 한계는 이미 사회의 곳곳에서 증명되고 있다.</p>

물론 나는 변희재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변희재는 그들이 너무나 ‘급진좌빨’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라면, 난 오히려 그들이 일관되게 다들 좌빨스러웠는지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변희재에 반대하는 근거는 386의 경험이라는 것들이 다양하다는 것이다.

386의 절대 다수가 데모를 했던 적은 87년 6월 밖에 없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span>. 그들은 2008년에도 급진적 선택을 함에 있어 망설였다. 그들은 명박산성을 넘을 수 없었다. 그들은 놓치고 싶지 않은 너무 많은 것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p>

</span>386의 일부가 급진좌파였다. 그리고 운동권의 다수는 늘 ‘제도화’라는 카드를 만지작 거렸다. 운동권은 민중주의 문화를 필요에 의해 소환했다. 마당극을 하고 민중가요-투쟁가-를 불렀다. 그리고 맥주를 마시면 죄의식을 느끼는 공동체 문화를 만들었고, 양담배를 피울 수 없었고, 콜라를 마실 수 없었고, 혹여 그렇게 즐기더라도 늘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문화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는 사실 당시 80년대의 20대 대중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운동가들이 ‘노동자’에 대해, 그리고 ‘민중’에 대해 ‘상상했던 바’를 통해 재구성해낸 ‘상상의 민중공동체’였던 것이다.</p>

그들은 그런 상상을 하면서 노동 현장에 가서 놀랐다. 노동자들은 생각보다 이기적이었고 생각보다 잘 살았다. 빈민 활동에 가서는 못 사는 빈민들과 그 아이들을 보면서 어쩌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순간에 무력했다. 특히 아이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펼쳐질 것이 자본주의가 전복된 후 새로운 사회주의의 공간이 아니고, 철거촌 바깥이 아니고 대학도 아니고, 기껏해야 공장 노동자가 될 것 같다는 걸 직감했다.

물론 그들의 그러한 ‘상상의 민중공동체’라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강력한 반공주의와, 운동의 기반 자체가 전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던 구조적인 제약에 의한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 더 차분히 대중들을 살피고 그들과 함께 ‘모색’하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물론 이 것 역시도 당시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이 온전히 찾을 수 있었던 카드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것은 필요했다.

어느 순간부터 운동권 엘리트들은 대중을 교화의 대상으로 가르치려 하는 시도들을 했다. 술을 처먹지 않으면 대화를 못하는 주제에 대중을 가르치려 한다는 대중의 따가운 시선들도 꽂혔다. ‘생활’의 중요성. ‘일상’의 중요성. 그러한 문제제기들. 일상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들이 이루어져야 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운동권의 대다수는 위에 언급했듯이 기회만 생기면 ‘제도화’의 구석들을 찾으려 했다. 물론 거기에는 초조함이 있었을 것이다. 일이 더 커졌을 때 감당을 못할 것 같은 강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제도권 야당과 국본의 ‘자유주의적 카드’를 뽑았다는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카드를 뽑은 것은 NL-주사파였다. 하지만 PD도 결국은 ‘범민중후보’라는 선거게임을 전제한 카드들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선거 프레임 자체가 전복이 되어야 하는 87년의 상황에서 그들은 선거 프레임 안에서의 상대적 진보성을 가지고 논쟁을 했던 것이다.

</span>결론적으로 80년대 학생운동은 그 내부 동학으로 볼 때, 대중운동의 수준에서 그리고 대중정치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기에 실패와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p.244).”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이로 인한 분노가 대중적으로 나타났을 때가 절정이었어. 그때 노제를 할 때 신촌에서 시청까지 온 거리가
꽉꽉 차고 지하철 위까지 사람들이 올라가고 그랬지. 그때 시청까지 가서 민중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다들 ‘다 청와대로 가서
전두환을 끌어내야 한다’고 외쳤지. 그때 서울대 총학생회장인가 하는 자가 나와서 띡 한다는 얘기가 “자제해야 하고 군부 개입의
빌미를 줘서는 안된다”나, 그 따위 소리나 하고 앉았고. 마치 80년 서울역 회군 때하고 너무나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지. 난
그때 민중들이 청와대로 가려는 것을 막지 않고 더 큰 분노를 이끌어 냈다면 지금보다는 좀더 민주화된 세상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들어”(p.198).</p>

</span>대중이 급진적으로 변했다면 아마 상황은 나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학생 운동은 오히려 그러한 대중의 급진성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문제지점은 이제 다시 지적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386들의 ‘민주화’에 대한 환상은 이제 좀 접어들여야 하지 않나. 86년 5월 3일의 인천을 기억한다면, 85년의 구로동맹파업을 기억한다면 말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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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여당에 가고, 야당에 가고 그 안에서 진보를 실현해야 한다고 외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자기상실감을 느꼈다. 잘 나가는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을 두고 하는 우스갯소리로, “운동권도 학벌이 좋아야지……”라는
자조어린 한탄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pp.56-57). “한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일찍 노동계급에 대한 부끄러움을 거두어 버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부끄러움은 한때 그들의 위선이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거친 글을 맺는다”(p.247).


언젠가 학생운동에 대한 내 경험을 쓸 날이 올 것 같지만. 그 때 난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나에게도 역시 학생운동은 늘 강박해오는 트라우마 같은 것인데, 자기성찰적 기술을 쓸 수 있을까. 이 책을 스무 살에 읽고 난 많이 변했는데, 그 변화의 기록을 언젠가 적어야 하지 않을까. 또 여전히 김원의 생각들이 녹슬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이러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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