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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10대와 대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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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수업 <문화예술의 사회학="">이라는 과목의 기말 과제를 위해서 ‘문화예술의 페다고지’라는 주제를 갖고 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관찰을 했다. 그래봐야 세 타임의 수업에 있었던 것이긴 한데. 이 수업은 10대 아이들과 함께 연극놀이를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직업상’을 찾아가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교육학을 전공하고 극단에서 연극을 하는 교사가 10대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했다.</p>문화예술의>
그 수업을 들어오는 아이들은 그 전에 이미 그 수업의 전신이었던 프로그램을 한 학기 동안 마친 아이들이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 옆에 있는 코디네이터와는 이미 ‘친해진’ 상태였다. 그 아이들은 이른바 ‘불량’ 청소년들이었다. 학교에 잘 안 나가고, 담배피우고 술 마시고, 알바 하고, 싸우고, 욕하고. ‘양아치’로 호명되고 ‘날라리’로 호명되고, ‘문제아’로 호명되는 그 아이들. 하지만 그 호명은 정당한 것일까?
</span>잘 생각해보면 그 아이들은 단일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의 감수성은 정말 풍부했고 오히려 여리기에 더욱 더 강하게 자신들을 한 두 가지의 잣대로 묶어내려는 어른들을 거부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학교에서 ‘공부’라는 단일한 이름으로 그들으 포함하고 또 배제시키는가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들 편에 설 수는 없었다. 그들이 그러는 것이 그들의 ‘악의 본성’ 때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의 수업의 참여도는 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했다. 여학생들만 있는 날과, 그들의 ‘남자친구들’이 오는 날의 수업의 몰입도는 완전히 변했다. 말 잘 하고 그래도 자신들의 표현을 하려했던 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이 오자마자 입을 닫았다. 남자 아이들은 더 나대기 시작하고 수업의 ‘성과’라는 것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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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누구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놓고 서로 대화해줄 ‘형, 언니, 누나, 오빠’가 필요했다. 나는 그 점에서 실패했다. 나는 늘 거리감을 유지하려 했고 ‘공정한’ 누군가가 되어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남자아이들이 담배피러 갈 때 겨우 “요즘 남자애들은 무슨 담배 피워? 난 던힐 밸런스 피는데.” 정도의 대화가 전부였다.
하지만 교육을 진행했던 동료가 말했지만, 그들에게 책임질 수 없는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개입하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그 짧은 시간에 감당할 수 없는 몇 가지의 ‘급진적인’ 말을 하고 그 말들의 힘으로 그들을 이끄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이 왜 그들에게 문제인지를 설명하려면, 그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그들과 함께 ‘관계성’을 만들고 같이 생활하듯 지내야 한다. 이 수업의 전 학기를 진행했던 동료는 그들 중 한 명이 가출했을 때 한강으로 찾아가 같이 소주마시며 달래고 또 그들이 필요할 때 늘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는 정학을 먹었지만, 가출을 했지만, 우리가 좋아서 놀러오곤 했었단다.
페다고지를 고민하면서 조금 더 ‘나은'(사실은 좀 더 ‘쉬운’) 답들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현장을 잠깐만 봐도 그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지를 깨닫게 된다. 그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다른 종류의 인간’이 자신들과 벽을 허물고 꼰대들과 ‘다른 방식’으로 어울려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들 주위에 누가 있을까. 꺽기를 하는 주유소 주인과, 온라인 포주, 학교에는 꼰대 선생들, 집에는 매번 질책만 하고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엄마와 아빠가 있다.
이 아이들을 한 참 기다리며 어제 계속 눈이 빠져라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그 녀석들을 1년 가까이 봤던 내 동료는 계속 시무룩했고, 난 잠깐 봤지만. 내 10대가 떠올라 자꾸만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수업 도중에 끊임없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서로 욕하고 장난치고 싸우고, 오는 전화 받고, 문자 받고 전화 걸고. 30초의 집중이 어려웠다. 교사는 끊임없이 인내심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들을 수업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인내심을 자극했다. 우리는 일 주일에 2시간이었지만, 학교에서 그 아이들을 대하고 있을 선생에게 ‘권위’와 ‘폭력’ 말고 다른 도구가 있을 지 궁금하긴 했다.</p>
그들과 무엇을 해야할까. 위기의 10대와 무엇을 해야할까. 학교의 선생들처럼 그들에게 정학을 주고,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가면서 ‘문화교육’이라는 과정을 위해서 달려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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