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이스트 Soloist (2009)

솔로이스트
감독 조 라이트 (2009 / 영국, 미국, 프랑스)
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제이미 폭스, 캐서린 키너, 톰 홀랜더
상세보기
  <p>
  </p>
  
  <div class="ttbReview">
    <table>
      <tr>
        <td>
          <a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M302435186&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img src="http://image.aladdin.co.kr/cover/moviecover/m302435186_1.jpg" alt="" border="0" /></a>
        </td>
        
        <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
          <a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M302435186&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 class="aladdin_title">솔로이스트</a> &#8211; <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8.gif" alt="8점" border="0" /><br /> <a href="http://www.alad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AuthorSearch=@233631&BranchType=8" class="gl">조 라이트</a>
        </td>
      </tr>
    </table>
  </div>
  
  <p>
    <span style="font-size: 11pt;"></span><span style="font-size: 11pt;">선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무조건 돕겠다고 덤비고, &#8220;내 진정성을 왜 몰라주냐?&#8221;라고 말한다 하여 그 &#8216;진정성&#8217;이 꼭 좋은 것도 아니다. 노무현의 진정성은 한미FTA도 진보가 수용해야할 규범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상 엄청난 사람에게 그것은 폭력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선의를 누군가에게 &#8216;강요&#8217;할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바라는 방식으로 함께 &#8216;대화&#8217;하는 데에 쓸 것인가. 여기에는 계몽주의의 문제가 걸려있다.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는 그 문제를 걸고 넘어간다. 함께 배우면서 함께 익히는 것이다.</p> 
    
    <p>
      백인에 <L.A. Times>의 잘 나가는 사회부 저널리스트 로페즈.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8216;착한 백인 남성&#8217;일 것이다. 뭔가 &#8216;따뜻한&#8217; 스토리를 찾길 워하는 그의 눈에 보여진&nbsp; 흑인 첼로 연주자 나다니엘의 천재성은 &#8216;불쌍함&#8217;의 기호로 읽힌다. 로페즈는 그를 매스 미디어를 통해 &#8216;사회&#8217;에 알리고 싶어한다. 그의 천쟁성을 그리고 그를 둘러싼 &#8216;더러운 환경&#8217;을. 그는 분명 선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8216;진정성&#8217;과 상관없이 늘 자신의 뜻을 따르지는 않는 나다니엘이 답답할 것이고, 그의 &#8216;정신분열증&#8217;적 반응 발견했을 때 로페즈는 &#8216;병원&#8217;을 권유한다. 그 &#8216;병증&#8217;만 치료하면 나다니엘이 자신과 같은 &#8216;보통사람&#8217;이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p>
    
    <p>
      지나가는 부랑자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들을 하는가. 그를 &#8216;정상인&#8217;으로 바꾸려 하고, 그것을 어쩌면 사회적인 &#8216;올바름&#8217;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들의 구체적 맥락을 &#8216;이해&#8217;하고 그들의 삶을 &#8216;존중&#8217;하는 태도를 갖추기는 할까. 10대의 &#8216;위기&#8217;의 청소년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8216;가정&#8217;으로 그리고 &#8216;학교&#8217;라는 공간에 돌아가지 못한 &#8216;결핍&#8217;으로 읽어내지 않는가.
    </p>
    
    <p>
      그들을 먼저 &#8216;환대&#8217;하고 그들과 함께 &#8216;우정&#8217;을 쌓는 일들은 생략되고 이미 우리는 고정관념에 젖어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8216;정상인&#8217;으로 끌고가려고만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 사람들이 우리의 맘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게 정말 환대하는 자세이고 우정을 쌓는 자세였을까. 그들을 더 나은 조건을 갖추게 돕는 일이긴 했을까? 왜 나다니엘의 맥락을 로페즈는 이해하지 못했을까. 아니 왜 이해하지 않았을까. 아니 묻기는 했을까?
    </p>
    
    <p>
      나다니엘과 틀어진 로페즈에게 그의 전부인이자 친구인 메리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8220;불가항력이야. 당신은 이 도시를 구할 수 없어. 나다니엘을 구할 수 없어.&#8221; 문제는 어쩌면 &#8216;구하려는&#8217; 태도. 그들에게서 &#8216;위기&#8217;를 느끼는 그 태도가 아닐까. 거기에서 &#8216;강박&#8217;, &#8216;집착&#8217;을, 편집증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닐까.
    </p>
    
    <p>
      서로 친구가 되었을 때 어쩌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되려 걱정했던 그 &#8216;위기의 친구&#8217;에게서 내가 더 치유받을 수 있다. 치료에서 &#8216;치유&#8217;로 문제는 전환되어야 한다.
    </p>
    
    <p>
      <솔로이스트>는 인류학자들이 늘 제기하는 &#8216;식민주의&#8217;의 문제 &#8216;제국주의적 시선&#8217;의 문제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다.
    </p>
    
    <p>
      <img src="http://submania.dothome.co.kr/wp-content/uploads/1/cfile2.uf.135C5B1D4B10DF688C24D0.jpg" class="aligncenter" width="500" height="350" alt="" filename="14130211328_60800040.jpg" filemime="image/jpeg" /><br /> </span>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