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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이스트 Soloist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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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M302435186&ttbkey=ttbpanic822253001©Paper=1"><img src="http://image.aladdin.co.kr/cover/moviecover/m302435186_1.jpg" alt="" border="0"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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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
<a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M302435186&ttbkey=ttbpanic822253001©Paper=1" class="aladdin_title">솔로이스트</a> – <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8.gif" alt="8점" border="0" /><br /> <a href="http://www.alad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AuthorSearch=@233631&BranchType=8" class="gl">조 라이트</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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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size: 11pt;"></span><span style="font-size: 11pt;">선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무조건 돕겠다고 덤비고, “내 진정성을 왜 몰라주냐?”라고 말한다 하여 그 ‘진정성’이 꼭 좋은 것도 아니다. 노무현의 진정성은 한미FTA도 진보가 수용해야할 규범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사실상 엄청난 사람에게 그것은 폭력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선의를 누군가에게 ‘강요’할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이 바라는 방식으로 함께 ‘대화’하는 데에 쓸 것인가. 여기에는 계몽주의의 문제가 걸려있다.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는 그 문제를 걸고 넘어간다. 함께 배우면서 함께 익히는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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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에 <L.A. Times>의 잘 나가는 사회부 저널리스트 로페즈.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착한 백인 남성’일 것이다. 뭔가 ‘따뜻한’ 스토리를 찾길 워하는 그의 눈에 보여진 흑인 첼로 연주자 나다니엘의 천재성은 ‘불쌍함’의 기호로 읽힌다. 로페즈는 그를 매스 미디어를 통해 ‘사회’에 알리고 싶어한다. 그의 천쟁성을 그리고 그를 둘러싼 ‘더러운 환경’을. 그는 분명 선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진정성’과 상관없이 늘 자신의 뜻을 따르지는 않는 나다니엘이 답답할 것이고, 그의 ‘정신분열증’적 반응 발견했을 때 로페즈는 ‘병원’을 권유한다. 그 ‘병증’만 치료하면 나다니엘이 자신과 같은 ‘보통사람’이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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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부랑자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들을 하는가. 그를 ‘정상인’으로 바꾸려 하고, 그것을 어쩌면 사회적인 ‘올바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들의 구체적 맥락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추기는 할까. 10대의 ‘위기’의 청소년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가정’으로 그리고 ‘학교’라는 공간에 돌아가지 못한 ‘결핍’으로 읽어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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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먼저 ‘환대’하고 그들과 함께 ‘우정’을 쌓는 일들은 생략되고 이미 우리는 고정관념에 젖어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정상인’으로 끌고가려고만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 사람들이 우리의 맘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게 정말 환대하는 자세이고 우정을 쌓는 자세였을까. 그들을 더 나은 조건을 갖추게 돕는 일이긴 했을까? 왜 나다니엘의 맥락을 로페즈는 이해하지 못했을까. 아니 왜 이해하지 않았을까. 아니 묻기는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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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과 틀어진 로페즈에게 그의 전부인이자 친구인 메리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불가항력이야. 당신은 이 도시를 구할 수 없어. 나다니엘을 구할 수 없어.” 문제는 어쩌면 ‘구하려는’ 태도. 그들에게서 ‘위기’를 느끼는 그 태도가 아닐까. 거기에서 ‘강박’, ‘집착’을, 편집증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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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친구가 되었을 때 어쩌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 되려 걱정했던 그 ‘위기의 친구’에게서 내가 더 치유받을 수 있다. 치료에서 ‘치유’로 문제는 전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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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이스트>는 인류학자들이 늘 제기하는 ‘식민주의’의 문제 ‘제국주의적 시선’의 문제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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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submania.dothome.co.kr/wp-content/uploads/1/cfile2.uf.135C5B1D4B10DF688C24D0.jpg" class="aligncenter" width="500" height="350" alt="" filename="14130211328_60800040.jpg" filemime="image/jpeg" /><br />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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