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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굴 대표하나? – “민주주의여 만세?” : <연세> 2009년 겨울호
이번 <연세> 2009년 겨울호에 올라갈 원고 중 일부이다. 학생운동에 대해 써달라 해서 ‘당사자’ 운동의 관점과 ‘구체성’, ‘상상력’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써 보려 했다. 분량이 좀 많아서 한 장을 실어 올린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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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누가 누굴 대표하나? – “민주주의여 만세?”
학생운동을 떠올리면 왠지 민중가요와 ‘민주주의’ 같은 단어가 떠올린다. ‘혁명’ 같은 단어에 비하면 좀 약하지만 어쨌거나 ‘데모’ 같은 말도 떠오른다. 그러한 심상들은 90년대 중 후반 학번들과 2000년대 초반학번들에게 학생운동은 왠지 ‘위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아마 ‘오덕’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어쨌거나 ‘민주주의’ 같은 말이나 ‘데모’ 같은 말은 잘 떨어지지 않는 운동권에 대한, 학생운동에 대한 이미지일 것이다.
잠깐 다른 나라 이야기를 해보자. 1968년에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 등지에서 엄청나게 큰 대학생들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한국처럼 독재정권 때문이었을까? 아니었다. 그 시작은 기숙사에 있는 여자 친구를 못 만나게 하는 것에 열 받은 남학생들의 분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 미국에서는 베트남 침공과 반전-평화의 문제와 흑인 인권의 문제, 도덕주의적인 성규범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과 연대한 거다.
그럼 여기서 한국에서 가장 학생운동이 잘 나가던 시절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4.19, 6월 항쟁 정도를 상정해 보자. 이 때 학생들은 왜 데모를 했을까? 무엇이 이들을 분노하게 했을까? 예전에 들은 한 교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학교 가톨릭 학생회실에서 비디오 한 편을 보았다고 한다. 거기에서는 광주 시민들이 총칼에 찔려죽거나 마구 폭행당하는 그런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수업을 듣던 친구 한 명이 창문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죄책감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80년대 초반에는 학교에 전경들이 상주했다. 학교 안에서 “전두환” 말만 해도 두들겨 맞고 잡혀가던 시절이었다. 거대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있음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 모순의 핵심에 있는 것들, 즉 ‘미국’이나 ‘전두환’, ‘자본가들’을 증오했음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하나 더 지적할 것은 ‘지식인으로의 책무’이다. 80년대만 해도 대학생은 뭔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해야 할 책무가 있는 존재들이었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읽으며 변명하지 않기 위해서 ‘실존적 결단’을 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겠다고 결의를 하곤 했다. 늘 학생운동은 자신들을 한국 변혁운동의 ‘전위’ 혹은 ‘대표적 존재’라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86년 10월 28일의 ‘건대 항쟁’ 이후 학생운동은 실질적으로 87년 6월 이전까지 거의 힘이 없었다. 학생운동은 자신들이 87년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굵직굵직한 데모의 주력은 노동자들이었다. 노동현장에서 학생운동 출신의 ‘학출 노동자’는 늘 한 동안 자신들을 ‘엘리트 인텔리겐챠’라고 생각하는 망상에서 못 빠져나와 헤매곤 했었다. 늘 그들은 ‘노동자’가 되고 싶었지만 겉돌곤 했다.
게다가 지금 와서 갑자기 80년대에 학생운동만 있었다고 하는 태도는 사실 ‘기만’에 가깝다. 80년대를 학생운동과 ‘민주주의’를 통해 구성하는 것은 하나의 ‘상상의 공동체’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87년에 학생운동은 계속 머뭇거렸고, 사실상 6월 서울광장의 ‘정치’가 ‘직선제 게임’으로 바뀔 때 학생운동은 방조했던 책임이 있다. 덕택에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 때 와서 급진적으로 투쟁했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당시를 음미하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이로 인한 분노가 대중적으로 나타났을 때가 절정이었어. 그때 노제를 할 때 신촌에서 시청까지 온 거리가 꽉꽉 차고 지하철 위까지 사람들이 올라가고 그랬지. 그때 시청까지 가서 민중들의 분노는 폭발하고 다들 ‘다 청와대로 가서 전두환을 끌어내야 한다’고 외쳤지. 그때 서울대 총학생회장인가 하는 자가 나와서 띡 한다는 얘기가 “자제해야 하고 군부 개입의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나, 그 따위 소리나 하고 앉았고. 마치 80년 서울역 회군 때하고 너무나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지. 난 그때 민중들이 청와대로 가려는 것을 막지 않고 더 큰 분노를 이끌어 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민주화된 세상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참 많이 들어”.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운동이 누굴 대표한다고? 그 주장은 4.19에 한정되어야 한다. 87년의 민주화는 ‘학생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 이후로도 학생운동은 자신들을 ‘민주주의의 담지자’ 혹은 ‘변혁운동의 선도적 주체’로 부르곤 했다. 즉 자신들을 민주주의 문제를 풀 ‘대리인’으로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스텝이 꼬였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시적인 문제들이 확실할 때 그러한 ‘대리인’으로의 학생운동은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시작되고 정치적인 억압이 가시적인 방식으로 펼쳐지지 않을 때 학생운동은 그 ‘대리인’의 역할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적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보이는 적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때문에 늘 ‘공허한 구호’에 학생운동은 집착하게 되었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하는 순간에도 한총련은 통일운동의 관점에서 ‘반미, 투쟁!’을 외치곤 했다. 좌파 학생운동들은 ‘김대중 정권 타도 투쟁’을 IMF 체제에서 빠져나오는 선언을 한 해부터 외치곤 했다.
1997년 IMF의 구제 금융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문제가 학생운동에 구체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학점 2.0에도 취직을 하던 시대가 사라지고 ‘무한경쟁’의 시대가 도래 했고, ‘이태백’의 시대, 청년실업의 시대가 갑자기 도래 한 것이다. 그제야 학생운동은 ‘예비 노동자’라면서 ‘지식인’에서 몇 단계 떨어진 자기규정을 하면서 현실의 ‘감’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이미 버스는 몇 정거장 앞에 있었다. 자신들의 문제를 ‘정치화’하고 ‘급진화’시키는 습관은 부재했다. 그런 태도는 대학생 ‘자신’의 문제를 푸는 것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습관 덕택이었다. ‘민중’이 굶고 있고 억압당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할 일은 ‘사소한’ 학교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거기에는 대학생이 ‘우월’하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하지만 그 추상적인 ‘우월성’이 구체성의 ‘우울함’을 만났을 때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고 학생운동은 속수무책이었다. 비권이 선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학생운동은 그 순간에 대학생이라는 ‘당사자’들의 문제를 ‘정치화’시키는 연습을 해야 했다. 하지만 모든 문제들은 ‘복지사안’이라는 관점으로 학생운동이 자신들의 ‘정치’를 위한 ‘부차적인 것’으로 사소한 것이 되어버렸다.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문제를 풀지 못하면서 ‘정치’로 규정되어 있는 ‘거대한’ 문제들만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매번 말로는 ‘학우대중’을 찾으면서 그들은 학우대중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구체적인 학우대중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것들은 늘 비권이 선취했고, 운동권들은 그러한 비권을 질시하면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환경에서 왜 ‘복지 정책’이 문제화되는지는 질문되지 않았다. 늘 학생운동의 ‘진정성’은 강조되었지만 그것들은 대중의 ‘구체적 맥락’과 겉돌았고 학생운동의 실천은 늘 헛돌았다. “민주주의여 만세!”는 이제 아무런 정보도 없는 말이 되었다. ‘어떤 민주주의’인지에 대해선 사실 별 질문이 없다. 이명박도 민주주의는 반대하지 않을 거다. ‘혁명’을 말하던 학생운동은 어느새 옛적의 ‘민주주의’ 타령이나 하는 ‘애늙은이’가 되어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