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인간과 이타적 인간의 문제일까?

27살까지 믿고 있던 게 있다. 사람들이 다 착해지면 나쁜 세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려면 이기적인 인간들이 마음을 고쳐먹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p>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믿지 않는다. 달리 말해, 이기적 인간들이 있었을 때 이타적 인간은 얼마나 지속가능할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는 거다.

M(MBness의 약자라고 해보자)이라는 이기적 속성을 가진 인간이 50명, A(Altruism)라는 이타적 속성을 가진 인간이 50명 있다고 쳐보자.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아마 다른 전제가 없다면 M이 이길 확률은 99.9%이다. M이 취득하는 지식은 모조리 A를 싹쓸어 버리는 데에 쓰일 것이다. A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M의 전리품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단순한 구도는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현실은 M이 10명있고 A가 90명 있기 때문에 유지될까? M이 간특한 생각을 먹고 있을 때 A가 쪽수가 많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건가? 거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세팅이 빠져있다. 이를테면 M과 A의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여러가지 종류의 자본-경제적 자본, 문화 자본 등등과 물리력, 권위 등의 권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 자원)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1.
만약 성악설을 지지한다면 가장 악한 존재는 태어나자 마자의 아기일 것이다. 하지만 아기는 그 설정에 있다 하더라도 악함으로 어른들을 죽이지는 못한다. 다만 괴롭힐 수 있을 뿐, 사실 아기의 생사여탈권은 어른에게 주어져 있다. 뭐 이를테면 어른이 악한 마음을 먹는다면 아이를 죽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전제 자체를 혼탁하게 할 따름이다. 사실 그리고 그 어른이 악한지 선한지도 달리 논해봐야 한다. 만약 선하다면 또 어른이 이기적이었다가 어떻게 이타적으로 변했는지의 ‘사회화의 과정’을 설명해야 한다. 만약 악했다면 남는 것은 어른과 아기의 물리적 힘과 자원의 문제가 되는데 아직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아기가 어른을 이길리 만무하다.

2.
만약 성선설을 지지한다면 가장 악한 존재가 최소한 아기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는 뭐 다른 문제가 병립할 필요가 없다. 다만 어떤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서 어른이 악해졌을 경우 아기는 죽는다. 여기에서는 어떻게 어른이 악해졌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어른이 이타적이고 선하다면 물론 아기는 죽지 않는다.

3.
따라서 문제는 인간의 어떤 본성을 지지하든 ‘사회적 관계’의 양상에서 남게 된다. 따라서 남는 분석의 대상은 다시 ‘사회적’인 어떤 것이 된다.

그러면 다시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를 말해보자. M의 속성을 지닌 인간이 50명, A의 속성을 지닌 인간이 50명일 때 어떻게 A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건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A가 살아남을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개발해 내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인간의 선하고 악함이 아니다. 그런 본질적인 속성에 대한 논의는 사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역동적인 ‘사회적 과정’을 간과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I(Intelligence 지식)라는 속성 하나를 인간에게 추가할 수 있겠다. A가 M보다 더 똑똑해서 자신들의 몸을 보호할 수 있게되면 M은 A를 죽이지 못한다. 게다가 M이 I를 갖게되었을 때 꼭 A를 죽이는 것은 아니다. M이 I의 속성을 갖게되면 그들은 짱구를 굴리기 시작할 것이다. A와 공존하는 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다 싹 죽여버리는 게 좋은 것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A를 싹 죽여버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M이 I를 가짐으로써 확인하게 된다. 이를테면 A가 다 죽어버리면 M 안에서 A를 찾게 될 것이다. 희생양을 소환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M은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서 적정수의 A를 남기게 될 것이다.

따라서 A와 M가 I를 확보함에 따라 그들의 전략은 서로 맞물리는 점에서 균형을 찾게된다. 물론 그 균형은 정태적인 한 점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포지션의 점이 될 것이다.

4.
홉스의 정치철학-사회계약론은 기본적으로 M 때문에 A가 싹 죽을까봐 ‘리바이어던’을 소환했다. 하지만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에서 밝혔듯이 구태여 거대한 국가나 새로운 권위체가 없이도 M과 A가 I를 습득할 경우 공존은 가능할 수 있다. </p>

이제 남는 것은 I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사실 지식이라는 것 자체의 밑바닥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고, 또한 지식이 작용하는 방식자체에도 ‘권력’이 늘 수반되기 때문이다. I는 ‘장기적으로 통용가능한 지식’이라고 볼 수 있고 Intelligence보다는 어쩌면 지혜Wisdom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Elinor Ostrom은 협력이라고 말했고, 맑스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형성되는 계급의식(이를 보다 가시화 한 사람은 게오르게 루카치였다)이라고 말했다. 이 I나 지혜도 사실은 역동적으로 계속 변화하는 것들이다. 19세기의 계급의식이나 분업체계하에서의 협력은 21세기인 지금 전혀 다른 맥락 안에 배치되어 있으니 말이다.

지금에 있어서 I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이는 맑스가 말했던 지식과 실천(Praxis)가 분리되지 않은 형태일 것이다. <페다고지>를 읽으면서 나는 그 I를 상호작용을 통해서 ‘함께’ 형성하는 어떤 공동의 지식(권력이 부과하는 훈육의 언표가 아니라)일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따라서 이 지식은 역시 이타적 인간들의 협력을 통해서 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나아간 건데. 어떻게 그것들을 구성해 낼 수 있을까? 또한 I는 여러가지 측면으로 분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문화적 층위(예술의 생산과 소비 경험, 패션, 등등)와 사회적 돌봄 등을 통해서 구성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들은 어떻게 또한 다시 묶이면서 공동의 I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p>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인간들이 착해지면 될 거라고 종종 이야기하는 도덕관념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를 생성할 따름이고 그게 현실에서 펼쳐질 경우 이미 무력하다. 문제를 푸는 방법은 다른 방식의 지식을 생산하고(문화를 생산하고) 그것들을 공동의 ‘경험’으로 펼쳐내는 것(사회를 재편하는 것)이다.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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