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억눌린 자들과 대화하기 – 파올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2009/11/22 – [생각하기/출간계획 및 생각 다지기] – 위기의 10대와 대화하기
![]() |
페다고지 – ![]()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그린비 |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Pedagogy="" of="" the="" oppressed="">를 읽었다. 40년이 된 책이다. 브라질에서 1969년에 나왔으니까. 특별하게 놀라운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지는 않는다.</span> 하지만 동시에 4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 때의 문제와 지금의 문제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서 그의 이론의 유효함을 찾는다.</p>페다고지>
먹물들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그럴 때가 많다. 파올로 프레이리가 경계하는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를 ‘위해서’라는 생각도 버리라고 한다. 억눌린 민중과 ‘함께’ 하라 말한다. </span>그의 이론은 흡사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와 맥락이 닿아 보이기도 한다. 자유로부터 도피해서 딱딱한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사실 그 껍데기를 뒤집어 쓰고 있는 사람들이 무서운 것도 사실이긴 하다.</p>
“</span>그러나 거의 언제나 투쟁의 초기 단계에서는 피억압자가 해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억압자나 ‘아류
</span>“불행히도 혁명 지도부 역시 혁명적 행동에 대한 민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려는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span>
“참된 교육은 ‘A’가 ‘B’를 위해, 또는 ‘A’가 ‘B’에 관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함께 행하는 것이다”(p.119).
‘은행 저금식’ 교육에서 빠져나와 문제제기식 교육으로 가야한다고 그는 또한 말한다. 함께 배우며 소통하기.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위기의 10대’를 만나면서 느꼈던 이상한 감정을 프레이리는 잘 알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잘 발굴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의 해방의 페다고지 교육 ‘프로그램’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인류학에서 한동안 ‘미개한’ 사회를 찾아가 ‘계몽’하겠다는 제국주의적 발상에 대한 비판들이 있어왔고 이제는 좀 변했지만 이 때만 해도 인류학자들이나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개발/저개발’의 눈으로 쳐다보곤 했었다. 그리고 그 학자들은 주위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낙인찍고 가버리곤 했다.
우리는 어떻게 억눌린 자들과 함께 소통하고 그 문제를 풀 수 있을까.
“피억압자의 말은 빼앗기고 사라져버린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빼앗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능력에 깊은
그리고 80년대식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생각할 단초를 얻는다.
“결정권이 당사자가 아닌 외부에 있다면 피침략자는 자신이 결정한다는 착각만 품을 수 있을
물론 프레이리는 전형적인 ‘인본주의자’이고 그에게 중요한 논의 중 하나는 동물과 인간을 구태여 구분해야 하는 것들이고 이에 대해선 “글쎄?”라는 생각들을 하면서 읽게 된다. 그리고 근대정치의 ‘생명 정치’와 관련된 훈육-통제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후에 나타난 푸코나 아감벤 등에 의해서 더 정교하게 기술되어있긴 하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프레이리가 주는 교훈은 녹슬지 않고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곧 ‘위기의’,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업들에 대한 기획을 진행할 것 같다. 나는 어떻게 그들과 ‘함께’ 변화할 수 있을까. 각자의 말을 찾으면서 우리는 서로 대화하며 세상을 바꿔갈 수 있을까?
억압자’가 되기 위해 애쓰게 마련이다. 그들의 사고구조는 그것을 낳은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상황의 모순에 의해 제약되어
있다”(p.56). “그들은 스스로를 억압자와 동일시하고 있으므로 자신을 피억압 계급의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이 토지개혁을 바라는 이유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땅을 더 많이 얻어 지주가 되기 위해서, 더 정확히 말하면 다른
일꾼들을 지배하는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이다. 감독자의 지위로 ‘승진’ 한 뒤 예전 동료들에게 지주보다도 더 그악스럽게 구는
농민들을 흔히 볼 수 있다”(p.57).
‘자유로부터 도피한’ 피억압자들의 껍데기를 벗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크게는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언어로 말하는 길을 함께 열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그들의 껍데기가 잘못되었음을 가르치고 그들의 껍데기를 깨주겠다며 가르칠 것인가. 1980년대의 한국의 운동권들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들은 맑스-레닌주의나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공장이나 농촌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주성’이 부족하거나 ‘계급의식’이 부족한 이들을 가르치곤 했다. 자신들이 ‘전위’라고 생각했고 앞장서서 문제를 앞에서 풀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p>
위로부터 아래로 향하는 은행저금식 기법의 덫에 빠지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pp.120-121). “민중을 끌어들인다는 말은
혁명 지도부의 어휘가 아니라 억압자의 어휘다. 혁명가의 역할은 민중을 획득하는 게 아니라 민중을 해방시키고 자신들도 함께
해방되는 데 있는 것이다”(p.121).
</p>
회의를 품게 되며, 그들을 무능력자로 간주한다. 억압자는 말하지 못하도록 금지당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말을 할
때마다 점점 더 권력에 익숙해지며, 지도, 명령, 강제의 단맛을 느끼게 된다. 결국 억압자는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p.173).
뿐이다”(p.207). “발전이 일어나려면 1)탐색과 창조성의 운동에 대한 결정권이 탐색자에게 있어야 한다. 2)이 운동은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의식적 탐색자의 실존적 시간에서도 일어나야 한다”(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