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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빅 브라더를 고르라는 지의 야바위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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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새물결 |
어떤 빅브라더인지를 고르라는 야바위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읽는다. 잉여-쓰레기-88만원세대의 공통점이 있다. 당하면서도 당사자들은 그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소비 자본주의는 늘 ‘새로운 것’을 욕망하게 한다. 동시에 노동의 양상은 늘 ‘임시적’이며, 노동의 장에서 그들은 ‘구닥다리’로 찍히거나 ‘나태하다’라고 찍힌다. 그리고 ‘예외’일 것 같은 양상은 지금도 계속된다. 잉여-쓰레기-88만원 세대 직전의 존재들은 불안감을 가지고 살지만 동시에 그 ‘예외’를 통해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하나는 ‘위로’이다. 아직 그렇지는 않다는 이상한 위로. 세계가 제안하는 답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는 착각.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안’이다. 늘 ‘예외’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 조바심을 내다보니 불안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못해서 불안하고, 동시에 딱지 맞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스스로 위로하는 상태.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고 특별히 다른 방향의 ‘활력’을 찾을 방법이 없다.
나는 특별히 신자유주의 체제가 ‘더 나쁜’ 자본주의 ‘체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체제’라고 정의하기에 각국의 ‘신자유주의’는 그 국가들의 숫자만큼 다양하고, ‘더 나쁘’다고 말하기에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의 상태에(9세의 아이들이 했던 노동) 비해 더 과격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디킨스 소설에 나오는 아이들은 정말 쉽게 굶어죽곤 했다. 하지만 더 ‘영악’하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대놓고 패는 사람보다 ‘고립’을 통해서 손쉽게 다스리려는 권력자의 ‘사탕’에게 더 큰 악랄함을 느끼는 거다.
다만 바우만에게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민자’와 ‘이주 노동자’들을 활용하는 권력의 전략이다. 늘 필요에 의해 소환되지만 늘 ‘송환’의 공포를 느껴야 하는 이주 노동자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배려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국 블레어 정부가 보여주었듯이 그 ‘배려’는 사실상의 동정심과 이민자에 대한 ‘배제’를 동반하다. 아프가니스탄의 난민들에 대한 호주 정부의 처사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잠시 경악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약 뭔가 더 악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시금 ‘인종주의’ 혹은 어떠한 양상으로든 인간의 등급을 관리하고 그것을 통해서 통치성의 재생산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늘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각개약진’의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한 각개약진의 전략들이 사르코지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한국에서는 ‘부동산’과 ‘토건’의 신화 아래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통치성에 대한 바우만이나 『호모 사케르』의 조르조 아감벤의 진단은 한 가지는 결여하고 있는 듯하다. 틈새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의 규정 말이다. 구태여 낙관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E. P. Thomson이나 E. Hobsbawm이 보여주듯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혹은 어떤 통치의 대상들에게 늘 우위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가들은 러다이트 운동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능동성’이, ‘활력’이 겁이 났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제기하는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말도 사실은 실천(Praxis)의 영역에서 아무리 억압적 상황에서도 ‘다른’ 사유를 그리고 실천을 했던 이들이 있었음을 대변한다.
그리고 책에도 언급되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의 이야기는 늘 경청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자본주의는 늘 그것을 포획하려는 것이든 분할 통치하려는 것이든 ‘비자본주의’적 영역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빈곳’이 있어야 자기 스스로의 끊임없는 ‘예외’의 쓰레기의 생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위협을 받지 않고 재생산이 가능해왔다. Gibson-Graham이 제기하는 ‘비자본주의적 실천’ 역시 그러한 틈새를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는 늘 우리에게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냐 없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늘 온전하지 않았고 다른 방식의 생각들을 엮어낼 수 있는 구성방식들이 생겨날 때마다 침윤당하고 조정되어왔다. 현상의 스펙터클을 넘어서 다른 방식을 어떻게 엮어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마 ‘두 명의 빅브라더’ 중 누굴 고를 거냐는 야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아, 물론 현상은 직시를 해야한다. 하지만 그것에서 머물러 떨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