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하며 대하기 – 가와카미 히로미, 어느 멋진 하루

어느 멋진 하루6점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류리수 옮김/살림

사람은 누구랑 대화를 나눌까? 실없는 질문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잠깐만 짬을 내 생각해 보면 그리 실없는 건 아닐 수도 있다. 일단 동물과 대화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한 걸로 다들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렌느 페퍼버그 같은 이는 ‘천재’ 앵무새 알렉스와 우정과 환대를 나누었다. 알렉스는 피곤할 때 피곤하다 말하고, 이렌느가 힘들 때 옆에 다가와 다독여주며 힘내라고 하곤 했다. 내 생각에는 제인 구달도 원숭이와 대화를 했을 것 같다. 물론 거기에 같은 ‘언어’가 등장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사람이 동물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건 맞는 것 같은데(사실 이건 동물의 기호를 우리 식으로 판단하려 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는 확실치 않은 것 같다. 만약 둘이 서로 못 알아듣고 있었다면 과연 수십만 년 동안 개와 고양이와 닭과 소는 어떻게 사람과 함께 살았을까. 아마 어떻게든 소통은 하고 산 것 같다. 그렇기에 대화했다고도 말할 수는 있을 듯하다.

그럼 동물 말고는 어땠을까. 우리는 성경에 나온 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십계명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까지 참 많은 신들과 만났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게다가 성경에 나오는 마귀들이나 천사들과 대화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여호와 하나님보다 그들이 멀리 있지는 않았다는 걸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아. 물론 그들을 섬기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과 ‘대화’를 했을 거다. 사람들은 주위의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에서 친숙한 ‘정령’같은 것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 ‘정령’들은 친숙해서 구태여 섬길만한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과의 늘 대화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기계문명이 도래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발생하면서 ‘과학적’이지 않은 그 친숙했던 것들은 없는 것이 되거나 ‘진리’가 아닌 것이고 ‘밝힐 수’ 없는 것이기에 잊혀져 버렸고 우리는 그들과 말거는 법을 잊어버렸다.

동물과 말하는 건 실 없는 짓이 되었고 정령과 대화하는 것은 황당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환영할 수 없게 된 거다. 덕택에 동물과 대화하지 않고 밀렵하거나 가두거나 잡아먹고, 우리의 ‘지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말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우리가 모르는 것들을 없애기 위해 혈안 되어 200여년을 살아왔다.

그렇게 200년의 습관을 쌓은 우리가 그들과 다시 대화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까. 일단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에게 납득될 무언가를 설명하라고 강요할 수 없진 않을까. 환대하면서 우리 바깥의 세계에 말을 걸면서 어떻게 우리는 살 수 있을까. 과거로 세상의 시계를 돌리는 것이 아닌, 대화하며 ‘우리의 시간’을 만드는 일. 그런 시간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가와카미 히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