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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이 쓴 최고의 신자유주의 분석 –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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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크 독트린 – ![]()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살림Biz |
2009/12/18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TV & Radio] – 나오미 클라인 Naomi Klein on The Joy Behar Show
나오미 클라인의 이름을 안 건 채 한 달이 되지 않는다. 창피한 일이다. 1970년생. 올해 우리 나이로 40살. 전 세계를 뛰어다니는 저널리스트이자 사회과학 저자이다. 최근 기후 변화협약 판에서도 엄청난 식견과 말빨로 우파들을 압도하고 있다. <쇼크 독트린="">을 읽고 그녀가 먼저 쓴
<쇼크 독트린="">은 짧지 않은 내용이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빼곡하게 근 30여년 간 벌어진 일들로 가득차 있다. 시카고 대학의 경제학부. 하이에크의 제자였던 밀턴 프리드만의 이야기로부터 시작이 된다. 2008년 한 동안, 그리고 올해 한 동안 우리는 시카고 학파의 몰락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의 종언’이라는 말도 올 한해는 심심치 않게 들린 것 같고 덕택에 케인즈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칼 폴라니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2008년 몰아닥친 ‘서브 프라임’ 사태는 신자유주의와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 동안 쏟아내게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고, 그러한 ‘전지구적 변환’과 상관없이 한국의 이명박식 정치경제 프로그램은 계속 진행중이다. 우리는 어떤 기준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그리고 전지구적 경제를 바라봐야 할까? </p>
밀턴 프리드만은 늘 논쟁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의 생애 초창기는 ‘소수파’에서 면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구상은 늘 ‘새로운 신세계’를 향해있었다. 그 구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오미 클라인은 맥길 대학의 카메론 교수의 특수한 정신치료 방법과 물려있다고 설명한다. 그 구상은 정신병 환자들을 ‘백지상태’로 만들어 새롭게 창조하는 구상이었다. 그것을 위해 시공간의 감각을 없애고 ‘퇴행’하게 만들고 그러한 상태를 극화 시키기 위해 ‘충격과 공포’를 마음에 가했다. 약물을 주입하고 전기 쇼크를 가했다. ‘치료’라는 말만 없다면 고문이었다. 이러한 카메론 교수는 나중에 미국 심리학회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는 CIA의 돈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충격과 공포’의 프로그램은 곧 이어 중지된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의 은유는 밀턴 프로그램의 세계관과 결부되어 저개발 국가들에 ‘충격과 공포’를 현시하고 만다.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애니메이션을 어렸을 적 봤던 기억이 난다. 아르헨티나의 이야기. 늘 슬펐지만 어쨌거나 엄마는 그곳에서 잘 살 고 있을 거고 엄마만 찾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아이의 모습과 나는 늘 동일시 되었다. 아르헨티나와 남미는 1960년대까지 ‘수입대체화 전략’으로 먹고살만 했다. 한동안 아르헨티나는 세계5대 경제 대국이기도 했다. 칠레, 브라질, 온두라스, 에콰도르, 우루과이 모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발전주의’ 경제정책으로 적절한 부의 재분배와 강력한 국유화 프로그램으로 경제체제를 잘 유지했고, 특별한 독재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밀턴 프리드먼은 그러한 ‘사회주의’를 참아낼 수 없었고 그들을 회유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p>
시카고 학파의 솔루션은 칠레 가톨릭 대학에 경제학부를 개설하고 그 학생들을 시카고 대학 경제학부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시카고 보이즈’의 탄생이었다. 그들은 박사학위를 마치고 다시 칠레 본국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순순하게 프리드먼의 꿈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순치가 되지 않을 때의 세계는 카메론이 말했던 ‘백지상태’의 창조였다. 쿠데타를 CIA와 더불어 계획하고 진행하고, 국민들을 흔들어댔다. 남미 각국의 정치적 혼란, 그리고 사회적 파괴는 시카고 학파에게 그리 대수롭지 않았다. 그들은 ‘백지상태’이기 때문에 새로운 경제프로그램, 국가가 최소화된 상태가 가능하리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독재자들은 시카고 보이즈의 말을 숭배했다. 모든 국영 기업을 민영화시키고 팔 수 있는 모든 국가의 자산을 팔고 긴축재정을 유지한다. 저항하는 모든 세력은 ‘충격과 공포’의 고문실로 보내지곤 했다. 그러한 계획은 모든 남미에 관철된다. ‘발전주의’는 한 때의 ‘구닥다리 체계’가 된다.
종종 미국의 우파들의 야바위가 있다. ‘자유주의'(Capitalism을 이렇게 부른다)는 늘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한 번도 그러한 시카고 학파의 솔루션이 자연스럽게 ‘민주적’으로 진행된 적은 없다. 프리드먼의 ‘쇼크’를 통한 ‘백지상태’는 늘 필요했고 그것이 없을 때에는 늘 각 국가들은 ‘민주적’으로 다른 방향의 사회경제적 방법들을 운용했다.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IMF와 World Bank를 이용하는 방법을 쓰곤 했다. 러시아와 동아시아에는 후자가 인용되곤 했다. 하지만 그러한 해법은 경제성장은 촉진시켰는 지는 몰라도 ‘중산층’을 해체했고, 빈곤율을 극대화시켰다. 양극화는 필연적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새로운 신세계’는 자본가들에게 퍼붓는 다른 방식의 ‘케인즈주의’였을 뿐이다(이를 우석훈은 케인즈 우파라고 칭하기도 한다).
2000년대 이후의 시카고 학파는 더 놀라운 환경에서 ‘백지상태’를 통해 새로운 신세계를 펼쳐낸다. 그것을 나오미 클라인은 ‘재난 자본주의’라고 칭한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이후 복원 프로그램은 시카고 보이즈의 솔루션을 그대로 따랐다. 원조 자본은 모두 국가의 외주사업(Outsourcing)에 지불되어 다국적 기업과 미국의 기업들을 위해 쓰였고, ‘공공적’인 모든 것은 집행이 금지되는 법안을 만들었다. 심지어 이라크의 고용도 보장하지 않았다. 외국인 하청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2004년 겨울의 쓰나미가 불어닥친 스리랑카는 집을 잃어버린 동부해안의 어민의 주택지에 ‘완충지대’를 설치하고 다시 주택을 짓지 못하게 했다. 관광특구로 지정하여 5성급 호텔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2006년 뉴올리언스의 허리케인이 벌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모든 재난 사업은 부시 행정부에 의해 외주화가 되었고 그 원조자금들은 주민들의 주택을 복원하는 데 쓰이지 않고 외주 기업들의 기업 설비에 투자되거나 어디론가 새어버렸다. 하지만 그럴 때 국가는 개입하지 않았다. ‘최소국가’가 그들의 꿈 아닌가.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주의였다. 부자들과 자본가들에게 국가는 국민의 혈세를 통해 그들에게 ‘복지’를 던져주었다. 주식과 횡령과 분식회계의 천국이 그들에게 펼쳐졌다.
2006년 11월에 밀턴 프리드먼은 죽었다. 하지만 뉴올리언스 사태가 벌어졌던 때에도 그는 죽어가는 와중에서도 펜을 들어 그 상황을 다시 새로운 세계를 펼칠 수 있는 기회라며 언론에 기고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그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맑스가 자본주의의 초창기의 ‘본원적 축적’을 사실상의 탈취로 말한 바 있다. 밀턴 프리드먼은 그야말로 ‘본원적 축적’. 인클로저 운동 시절의 모습이 왜 필요한지를 다시금 잘 보여준다. 상호호혜 같은 것은 개나 주라는 믿음, 그리고 그것들을 실제로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다.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신자유주의는 폭력이었고 고문이었고 학살이었다.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어정쩡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모든 책들을 <쇼크 독트린="">은 압도한다. </p>
나오미 클라인은 여전히 정력적으로 뛰어다니고, 활동가로, 저널리스트로, 또 한 명의 괜찮은 사회과학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힘은 한 선으로 묶어내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형성을, 그리고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자들을 묶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묶어냄은 추상의 차원이 아니라 엄청난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된 구체성으로 나타난다. ‘학문’으로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측면이다. 마치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가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독서량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너무 매력적이고, 그녀의 책은 덕택에 정말 ‘쇼킹’했다.
그녀는 뉴올리언스에서 이제 정부에 기대지 않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통해 복원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저항을 시작한 남미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긴 이야기를 마친다. 600페이지의 책을 읽으면서 피곤해질 여유도 없고, 계속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굉장한 이야기 솜씨도 갖추고 있다.
한국은 지금 어느 위치에 있을까? 강만수와 윤증현의 경기부양은 늘 우파 케인즈주의자들의 그것이었다. 종부세를 말하며 ‘종부세 납세자들의 피눈물’을 이야기하던 강만수가 떠오른다. 노무현 시기도 사실상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양극화는 완화되지 않았다. 시카고 보이즈의 믿음에서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몇 가지의 옵션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 옵션들을 그나마 최대로 활용한 것은 김대중이었다. 노무현은 FTA라는 안드로메다행 열차를 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 자체에는 분명 ‘제약구조’가 있었다. 그것은 인정해야 할 듯 보인다. 하지만 이명박은 그 ‘제약구조’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거기에다가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하이퍼 토건주의는 멈출 기세가 없다. 사실 이러한 토건주의는 남미에서도 보았던 것이고, 위에 언급한 스리랑카에서도 보인다. 뉴타운의 이야기는 ‘경비업체'(블랙 워터)를 동원하여 장벽을 치고 원 거주자 주민들을 쫓아냈던 이스라엘(즉 팔레스타인인들), 뉴올리언스의 이야기, 남미에서도 발견되는 이야기다. 한국 경제가 다시 남미로 가고 있다는 우석훈의 지적은 나오미 클라인도 동의하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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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번역은 정말 개 거지 같다. 도대체 김소희라는 사람은 ‘사회학과’씩이나 나온 사람이 맞을까? ‘자본주의자’는 도대체 뭘까. 또 ‘조합주의’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개발독재를 하는 강경한 신자유주의 국가? 그렇다면 오히려 국가-조합주의라는 표현을 써야하지 않나? Corporatism은 종종 복지국가를 지칭한다. 에스핑 안델슨 같은 ‘사회-조합주의’를 말하는 학자가 신자유주의 독재국가를 조합주의라고 말한다면 뒤로 넘어질 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Class를 구태여 ‘계층’으로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층이라고 쓰더라도 문맥에서 ‘투쟁’을 암시하고 ‘위계Hierachy’를 표현할 때에는 분명 ‘계급’이 적절한 번역어가 아닐까? 마지막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지랄’이라고 써 놓았다. 옮긴이의 말을 써 본다.
“그녀가 경고하는 미래상은 너무나 우울하고 충격적이어서 어쩌면 100퍼센트 동조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 어떤 이념적인 대결 구도가 아닌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오미 클라인은 이 ‘재난 자본주의’를 그리고 ‘쇼크 독트린’이 사실 이념적으로 무장된 신념의 문제라고 명백하게 지적했다. 왜 할 필요도 없는 말을 하는가. 참…
어쨌거나. 굉장한 책이다. 페이퍼 때문에 읽었지만 방학하고 짬이 나면 다시 꼭 숙독해봐야겠다. 그리고 마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를 이어서 다시 보면 ‘신자유주의와 도시’라는 주제에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을 듯하고 내가 원하는 새로운 도시에 대한 아이디어를 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