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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비판으로서의 학교 비판 – 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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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 ![]() 이반 일리히 지음, 박홍규 옮김/생각의나무 |
2009/12/07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억눌린 자들과 대화하기 – 파올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2009/11/22 – [생각하기/출간계획 및 생각 다지기] – 위기의 10대와 대화하기
2009/11/06 – [생각하기/출간계획 및 생각 다지기] – 2학기 논문 계획 – 남성의 군대 경험의 재구성, 문화예술 페다고지
중학교까지 학교는 내게 ‘공포’와 ‘억압’과 ‘우울’의 공간이었다. 학교를 가기 싫어 아침에 울면서 버틴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맞을 까봐 두려웠고, 따돌림당할 까봐 두려웠고, 체육 시험이 두려웠다. ‘남자’가 아니라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굉장한 ‘자존심’이 강했던 나를 같은 반의 녀석들은 언제나 괴롭혔다. 나에게 소통의 기제가 없기도 했지만 그녀석들도 나와 잘 대화할 수는 없었나보다. 물론 그들을 지금와서까지 싫어하지는 않지만, 난 어렸을 적 늘 그들에게 몰려 창문으로 탈출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갖고 있는 조울증 중에 우울한 면은 아마 중학교 때 생겼으리라 생각한다. 엄마 말고는 도피할 곳이 없었다. 학교 선생들은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놀게 되면서 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풀려버렸다. 결국 학교는 내 문제를 풀어준 적이 없다. 학교는 내게 늘 문제적이거나 문제가 발생하는 현장이었다.
이반 일리히를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정과 환대의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그 ‘우정’은 이반 일리히가, 환대의 개념은 데리다가 제공했다는 것 정도 알 뿐이다. <문화예술 페다고지="">를 말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자료를 찾던 도중(생각보다 자료가 많지는 않다) 내 방에 쌓여있는 책들 중에 있었던 <학교 없는="" 사회="">를 집었다. </p>
학교의 폐단에 대해 지적하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반 일리히는 ‘학교’를 떠올리지 않고 교육을 생각하는 것. 즉 ‘학교화’ 말고 ‘비학교화'(이전까지의 번역은 탈학교였는데 역자 박홍규는 비학교화를 채택했다. 학교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 말고 다른 대안들을 포괄하자는 이유라서란다)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의 주장 몇 가지는 맞는 것 같다. 빈곤의 문제는 종종 교육의 문제로 환원되고 그 교육의 문제는 ‘교육’ 그 자체가 아니라 학교교육시스템의 문제로 환원되곤 한다. 우리는 가난한 이유를 못 배웠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것의 함의는 ‘무식한’ 것이 아니라 ‘가방끈이 짧다는 것’을 의미하곤 한다. 정규 교육 과정에 대한 숭배는 좌우파 모두 공유되곤 한다. 아나키스트 일리히에게 그러한 생각들은 터무니 없다. 나 역시 그 부분은 어느 정도 동의한다.
또한 학교에 대한 논의들에서 최근 ‘억압기제’로서의 성격이 무시되곤 하는 것을 일리히는 40년 전에 이미 예측했었나보다. ‘학교붕괴’ 이야기를 그는 이야기하니 말이다.
“사실 건전한 학생은 그들이 더욱 전반적으로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에 따라 수업에 대한 저항을 자주 배가시킨다. 이러한
저항은 공립학교의 권위주의적 교육방법이나 몇몇 자유학교의 유도적 교육방법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교에 공통된 근본적인
접근 방법에 기인한다. 그것은 타인이 배워야 하는 것과 배우는 시기를 한 사람의 판단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p.93).
또한 학교가 ‘시민성 교육’과 ‘기능 교육’ 양자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양자 모두를 놓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옳다.
“사회를 비학교화한다는 것은, 공부의 본질에 두 가지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오로지 반복훈련만을 주장한다면 불행하게
되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공부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일 학교가 기능공부에 부적합한 곳이라면, 교육에도 부적합한
곳이다. 학교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학교가 그 둘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p.50).
하지만 그의 비판들은 ‘기술관료제’와 연류된 모든 문명 전반에 대한 거부로 진행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나는 반대한다. 이를테면 나는 ‘생태’문제에 대한 대안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심성’의 전환이라든가 아니면 ‘태도’의 전환을 통한 ‘생태적 감수성’에 대해 비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착해지면 세상이 행복해질까? 거칠게 말해서 일리히는 사람들이 착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학교’라는 파놉티콘을 해체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밑에 깔린 더 근본적인 생각은 ‘문명 해체’의 시나리오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절대 좌파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부인할 테지만. 이를테면 도제시스템에 대한 믿음을 나는 급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금도 비학교화와 동료연결시설 설치의 가장 중요한 결과의 하나는, ‘대가’가 마음에 드는 제자를
모으기 위해 주도권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앞에서 보았듯이, 잠재적인 제자가 정보를 공유한다든가, 진정한 대가를
선택하는 풍부한 기회를 부여한다”(p.193).
그의 ‘동료연결시설'(요즘으로 하면 우정의 네트워크쯤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에 대한 생각들을 존중하면서도 ‘대가’를 표현하는 그의 생각에는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중세적인 향수가 느껴진다.
실질적인 대안인지도 모르겠다. 실천의 장에서 확실히 <페다고지>의 파올로 프레이리가 이반 일리히의 이론을 압도한다. 프레이리의 통찰은 당장 내가 누굴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해야할 지에 대해 성찰점을 늘 준다. 하지만 일리히에게서 그걸 찾지는 못했다. 나만 못 찾았을 수도 있다. 근데 과연? </p>
물론 그의 이론에 대해 ‘현재적’ 비판을 하는 것은 40년이라는 격차를 무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순수한 열정을 지닌 휴머니스트였고, 젠더의 정치적 맥락을 70년대에 지적한 ‘남성’이기도 했고, 국가의 억압과 관료제의 업압을 통찰력있게 지적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반 일리히의 생각에 머무를 수는 없다. 더 나아가야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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