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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 운동, 아직도 대안일까? – 김원, 신병현 외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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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정치의 장소들 – ![]() 김원 외 지음/천권의책 |
2002년 메이데이가 떠오른다. 고대에서 4월 30일 4/30 문화제를 치르고 선배 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밤을 꼴딱 샜다. 그리고 5월 1일. 여의도 광장으로 나섰다. “단결투쟁” 조끼를 입은 노동자 아저씨들이 담배를 여기저기서 뻐끔뻐끔 피워대고 있었고, 단상에서는 그 당시 ‘신세대’ 민중가요패 ZEN이 문선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민주노총 깃발이 단상 위에 휘날리고 <단결투쟁가>와 <철의 노동자="">를 부르면서 투쟁구호를 신나게 외쳤다. 왠지 모를 위압감. 빡센 게 멋있었고, 주사파들의 판(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학생운동판이나 민주노총판이나 큰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에서 나오는 민중가요패 <우리나라>의 노래들보다는 노동가요를 취향상 더 좋아했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더 좋았다. 정연하게 모여서 한 목소리로 <철의 노동자="">를 부르는 그 모습. 최보은이 나와 <불나비>를 부르던 모습. 거리는 뜨거웠고 온몸이 찌릿해지곤 했다. 그 정도가 내 첫 메이데이의 기억이었다. </p>
지금 우리는 ‘노동운동’의 문제를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인민노련 시기의 ‘급진노동운동’시기부터 역사를 거슬러 2000년대의 노동운동의 문제에 도달한다. ‘귀족노조’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많이 들어왔고 우파든 좌파든 그 문제를 세게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민주노총’ 중심의 ‘민주노조운동’ 자체에 대한 성찰점들은 많이 제출되지 않은 것 같다. ‘문화연구 시월'(이제는 해소되었지만)의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발본적인 문제제기를 제대로 하고 있다. 좌파들이 ‘민주노총’에 대해 비판을 할 때 그 배후에는 특정 정파 하나가 걸려있고 그 시선에서 이야기할 때가 많은데 반해, ‘문화연구 시월’의 이야기는 급진적이고 ‘민주노조운동’ 그 구도 자체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p>
이들은 ‘민주노조운동’ 자체가 ‘시효만료’. 이미 적절한 시기를 놓쳤다고 말한다. 예전에 학생운동에 대해 나왔던 책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이라는 책을 떠올리게 된다. ‘민주노동운동'(이것 자체를 ‘귀족노조’나 ‘정치판’ 논리로 환원할 수는 없다)은 구체적인 현장에서 제출되는 문제들을 가지고, 그리고 가능성들을 통해 ‘노동운동’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로부터 시작되어온 ‘민주노조운동’의 규칙에 의해 ‘습관적’으로 움직여온 것이다. 그것은 1997년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 사태로 빚어진 ‘노동의 유연화’와 ‘정리해고’라는 기점을 통해 그 정점에 도달한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이라는 금속노조의 대표적 노동조합의 모습은 가장 전형적인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현대차 노동자들은 노조와 회사에 ‘이중 몰입'(이중 충성)을 행하고 있다. 조합원 노동자들에게 노조가 잘해야 하는 일은 ‘잔업 특근 물량’을 확보해야 하는 일이다. 노조가 관심 있는 일은 파업을 통해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일이며 이 안정은 회사와의 담합을 통해, 그리고 비정규직과 파견노동자들을 착취에 눈감음을 통해 해소된다. 물론 하청계열의 비정규직은 수직계열 안에서 더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며 여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998년의 <밥,꽃,양> 사태가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사태에 대해 ‘도덕적인’ 비난은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고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곤 한다. 오히려 문제는 거대한 노동자들의 ‘구심점’의 정치. 즉 저자들의 표현으로 하면 ‘외재성’의 정치에 환원될 수 밖에 없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외재적 접근은 ‘민주노조’운동에 투신한 활동가들의 주체성을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형성과 그 계급적
정치라는 틀 속에서 파악할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 경제발전, 상대적인 삶의 질 향상, 인간적인 처우 등과 같은 외재적
요인들로 ‘민주노조’ 운동을 설명할 것이다. (……) 내재적 접근에서의 ‘민주노조’ 운동은 진정성, 인간주의 또는
영성주의, 희생, 자부심, 평등주의, 희망 등 사고의 내용을 구별하는 용어들로 포착하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시도를 벗어나는
개별적 사고 형식을 갖는다. 그 주체성은 비인간적인 억압과 처우, 멸시, 좌절, 설움, 탄압, 감시와 위협, 노동해방 세상,
열사, 분출, 복받침 등의 용어들로 간간이 그 희소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할 뿐이다“(p.31).
이러한 ‘외재적’ 접근은 그 나름의 역사성을 갖고 있었지만, 이제는 ‘시효만료’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을 ‘습관’처럼 고집하는 순간, 차별과 배제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바로 그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98년 현대의 ‘정리해고’의 경험들과 현대자동차 회사측의 공세들, 정규직 노동조합의 인식들은 새로운 ‘가족주의’들을 더 강하게 만들어내곤 했고 이는 젠더위계를 더 강하게 만들어냈다. “아빠, 힘내세요.”의 세상이 온 것이다. 조주은의 <현대가족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작업장 내에서는 ‘단결투쟁’을 외치고 ‘진보성’을 담보하는 그 남성 노동자들은 집에 가서 ‘잔업’에 골아떨어져 전형적인 보수적 경상도 남자가 되곤 했다(2009/10/08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노동자의 아내,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들의 이야기 – 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여성들의 노동은 사소화되고 희생되곤 했다. ‘가족 임금제’는 남성노동만의 특권화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부인, 즉 여성의 소득은 부수입이 아니다. 노동자계급 가족 대다수는 결코 하나의 소득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p.131). 점차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진행되는 현재에 있어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여성노동자의 조직율은 참고로 5%에 불과하고 비정규직 중 여성은 70%이다. 여성노조를 바라보는 노동조합을 바라보라.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정치의 문제는 또한 가족을 통해서 사유되어야 한다. “이렇듯 노동자 정치의 장소로서 가족의 의미는 공장이나 지역과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장소는 생산과 재생산의 영역이자 소비와 여가와 문화의 공간, 즉 노동자가 일하고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장과 지역, 그리고 가족은 노동자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되지 못했다. 공장과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조차도 국가와 자본에
빼앗긴 장소이다“(pp.14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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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면 답답함에 담배를 물게 된다. 하지만 저자들은 그렇게 비관적이지 않다. 단지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의 시효만료를 넘어선 새로운 운동에 대한 전망을 모색할 뿐이다. “그런데 그 ‘위기’는 과연 노동자들의 계급적 운동 전반의 위기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위기’는
‘민주노조’ 정치만으로는 더 이상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기의 변화된 현실과 엘리트 중심의 노조운동에 대한
대중적 사고와 정서의 이반으로부터 오는 불안과 사고들에서 기인한 것일 뿐이다“(p.34).
조한혜정의 <글읽기와 삶읽기=""> 1권에 나오는 감응적 개념이라는 말이 떠오른다(2009/09/06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감응적 개념 – 조한혜정, 글 읽기와 삶 읽기 1). 다시 현장을 통해서 ‘감을 잡아가며’ 구성하는 지식. 탈식민화된 지식을 구성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노동 운동. “새로운 노동자 문화운동은 ‘공장 안에 갇힌 실천’을 넘어서 지역 차원의 노동자 운동(공동체 운동)의 ‘일반화’를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이다“(p.113). “새로운 노동자 정치를 위해서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공장’이라는 장소를 진정한 이 시대의 노동자 형상이 지배하는 생동성의 장소로 회복하고 다양한 노동자 정치양식들이 사고 될 수 있게 하는 일이다“(p.62).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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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지금이 ‘위기’라면서 당장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굉장한 파국에 도래할 것이라는 ‘협박’들이 난무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삶의 문제들에서, 사회의 문제들에서 ‘위기’를 맞게된 건 단순한 한 두가지의 ‘결정적 순간’들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쌓아온 누적된 ‘오래된 습관’들 때문일 때가 더 많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다시금 그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의 습관들을 다시금 돌아보고 새로운 대안들을 ‘발견’하는 것들. 지금까지 사소하게 바라봤던 것들을 다시금 조명해서 보는 일들. 재전유. 많은 말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개개인이 발딛고 있는 구체적 맥락. ‘우리’를 통해 구성되는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 아닐까. 그것에서 ‘해방’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말할 수 없었던 이들로 자신들의 말을 할 수 있게 해주기.
김원 선생을 다음 주에 만날 듯 싶은데.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고. 신병현 선생 책들도 좀 다시 뒤척거려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