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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지금. 문화를 번역한다는 것은? – 김현미,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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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 – ![]() 김현미 지음/또하나의문화 |
2009년 가을 학기, ‘군대’ 이야기를 가지고 <학생콜로키움>이라는 것을 했다. 논평은 문화학과의 3분 운영교수들이 하시고, 이어서 학생들의 코멘트가 이어지는 시간이었다. 조한은 “미국에서는 여군들이 어떻게 군대를 가는 지 알아봐.”라고 단말마로 코멘트를 하고, 나임은 “연구 주제에 연구자가 개입하고 싶어하는 건 뭐죠?”라고 코멘트를 했다. 마지막 김현미 선생의 코멘트는 잊기 힘들 것 같다. “도대체 뭐 편하게 군대가는 애들 몇 명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지금 재난자본주의라고 해서 군대라는 게 별 필요가 없고 이미 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 다 민영화되고 싶은 마당에 그 군대 이야기 몇 명 인터뷰 했다고 이야기꺼리가 되나?” </p>
며칠 지나 김현미 선생 방에 찾아가 몇 권의 책을 추천 받았다.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 피터 W. 싱어의 <전쟁 대행="" 주식회사="">, 그리고 켄 실버스타인의 <전쟁을 팝니다="">. 읽고나서 군대 이야기를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권을 책을 읽어냈던 4일간 매일 감전당하는 기분이었다. 난 그 전까지 김현미 선생의 작업들을 ‘이주’, ‘여성’,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표상’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구체적 양상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다른 분야에 대한 깊은 호기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읽었던 ‘군대’에 관한 논문들의 지도교수가 연대에서는 김현미 선생이었다. 난 참. 잘 알지도 못하면서. </p>
김현미(이하 존칭 생략)의 <글로벌 시대의="" 문화번역="">을 처음 읽은 것은 9월 달이었다. 책 표지 다음 장에 9월 23일부터 읽었다고 쓰여있다. <젠더연구입문>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읽었다. 하지만 그 앞뒤에 있는 내용들은 살피지 못했고, 겸사 겸사 어제 밤에 3시간 만에 후딱 읽어버렸다. 건성 읽은게 아니고 너무 잘 읽혀 빨리 읽은 거다. 강의할 때의 정제되고 쏙쏙 머리에 들어오면서도 재미있음이 문체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구더더기 없는 기술. </p>
인류학 근처에 있기 전의 내 모습들이 떠오른다. 여전히 많은 층위에서 교조적인데다가 문화를 바라볼 때 여전히 ‘구조제약’과 ‘행위’의 양자택일에서 왔다갔다 했을 뿐이었다. 이를테면 민족주의 문제만 나오면 일단 들이받고 똑같이 민족주의자를 비난했다. 사실 대중은 민족주의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반대로 민족주의자가 아닌 것 같으면서 민족주의자이기도 한 거다. 그 말은 민족주의라는 말 자체가 대중의 다양한 맥락들을 온전히 뽑아내지 못한다는 거다. 그건 아마티아 센이 <정체성과 폭력="">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사람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쨌거나 난 그 전까지는 굉장히 한 두 가지로 사람들을 쉽게 환원하곤 했다. 그들의 맥락들의 변화를 잘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p>
데이비드 헬드의 <전지구적 변환="">을 2004~5년에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후로 또 다시 나는 ‘민족국가’안의 사고들을 한 동안 길게 했다. 전지구적으로 변화하는 글로벌한 맥락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2005년 내 기말 페이퍼에서 <초국적 사회운동="" 연구를="" 위한="" 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글로벌한 맥락들은 그 자체로 모두를 지배적 문화로 이식하는 게 아니라, 그 나름의 ‘혼종hybrid’들을 만들어낸다. 나는 김치에 치즈를 얹어서 포도주에 먹으며 살고 있지 않나. 하지만 그러한 것들에는 위계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입’의 지점과 ‘드러내기’의 지점이 있는 것이다.
“문화 연구자는 문화 현장의 단순한 ‘해석자’가 아니라 문화 현장 곳곳에서 흘러넘치는 증후들을 읽고 의미 있는 지식으로 만들어내는 ‘개입자’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p.21). 어쨌거나 그 이후로 그러한 생각들을 한 동안 하지 않고, 기껏해야 지금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10년 후쯤 폭동이 날 거라는 묵시록적 전망이나 해대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내가 관심을 가진 건 순전히 한국사회의 ‘조선놈들’끼리의 일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게 되지만 ‘조선놈들’끼리의 문제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다차원적인 질서에서 은연중이건 명시적이건 영향을 주고 받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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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 읽은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을 읽다가 참고문헌에 계속 등장하는 이름이 ‘김현미’였다. 도대체 뭘 뽑아냈을까를 생각하다가 집었는데. 읽다보니 왜 그들이 인용을 했는 지를 이해했다. 그것은 ‘여성 하위주체’ 즉 탈식민적 관점에서 늘 이야기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이야기들 때문에 그랬다. 스피박의 87년 논문을 다시 훑어보았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구성되는 것은 없다. 늘 우리의 서사로(서구 남성의 눈 혹은 입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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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의 학위 논문 주제였던 M 기업의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굉장히 역동적이다. 그녀들은 전경의 침탈에 ‘부녀자’로 호명되며 과잉진압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로 일컬어지고, ‘아줌마’로 호명될 때에는 아이들과 연동되고, 해외로 나가 소송을 할 때에는 ‘국가 망신’의 기호로 소환된다. 그들이 가졌던 ‘노동쟁의’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제3세계 여성’으로 호명되면서 ‘노동쟁의’라는 그녀들이 표현하려던 이야기들은 결국 중심 이슈가 되지 않는다. 김현미는 문화번역을 통해 그녀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려 한다.
2002년의 월드컵 때 거리로 나온 여성들의 이야기나, 일본음악을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한류의 이야기. 우리는 손쉽게 월드컵 이야기를 “민족주의 과잉” 혹은 “오 필승 코리아”의 이야기로 담았지만, 그것을 실제적으로 움직였던 사람들의 맥락을 이해하지는 않았다. 지식인에 의해 ‘과잉 대표’되고 또 동시에 ‘과대 비판’ 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본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일본 제국주의-식민지 시기’의 이야기들로 ‘왜색’의 이야기로만 진행했을 뿐, 그것들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맥락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았다. 한류도 마찬가지. “국가 문화산업”의 기호로만 호명된 건 아닐까. 어떤 맥락에서 일본의 중산층 여성들이 욘사마에 열광했는지에는 특별한 관심이 없는 거다.
이러한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의 누락은 오류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리고 또한 권력 작동들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이름을 붙여달라 한 적이 없다. 그냥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이름붙임에서 벗어날 때 그들을 향해 ‘위반’의 딱지를 붙여댄 건 아닐까. 2002년 월드컵 때문에 나왔던 여성들이 곧 이어 열린 ‘촛불’의 광장에 나왔을 때 우파들이 했던 폭언들을 생각해보라. ‘반미’라는 낙인은 그들을 관리하기 위한 기호였다.
하지만 그 낙인들, ‘규정’들 그리고 ‘환원주의’들 바깥에서 사람들의 일상은 글로벌한 맥락에서, 로컬한 맥락에서 계속 미끄러지며 다른 실천들을 만들어낸다. 또 다른 한 편에서 우리의 삶의 ‘맞닿은 경계’를 만드는 거시적 맥락 또한 아감벤이 말한 ‘헐벗은 신체들’의 맥락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 관계로 재편되고 있다. ‘환원주의’의 기표를 발견하는 방식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일자一者’의 논리였고, 그것들은 푸코가 말했던 ‘감시와 처벌’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점차 정착이 되었다. ‘대중들의 실천’ 특히 ‘비가시적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실천들을 가시화시키면서 환원주의적 기표에 대항하는 ‘대항 지식’을 만드는 일. 문화의 ‘번역’에 ‘개입’하는 일. 문화연구자의 일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알튀세가 싫었던 이유도 다시금 명료해진다. 억압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 환원되지 않는 대중들의 ‘전복적 실천’을 우리는 읽고 있긴 한 걸까.
책이 출간된지 이제 5년이 되었다. 여기에 나온 사례들은 이미 ‘시효만료’에 달해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김현미가 지적하는 ‘문화번역’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그리고 연구자의 개입이라는 문제도 여전히 남는다.
“문화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대치하는 일반적인 ‘번역’과는 다른 것으로, 타자의 언어, 행동
양식, 가치관 등에 내재화된 문화적 의미를 파악하여 ‘맥락’에 맞게 의미를 만들어 내는 행위. 그러므로 문화 번역은 번역이
이루어지는 특정 시공간적 맥락과 문화 번역의 행위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두 문화적 행위자 간의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위계적인 관계를 고착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 번역을 역사적으로 추동해 온 힘들은 무엇인가? 그 힘들을 분석하는 것은
‘문화’의 개념과 방법론을 정의해 온 근대적 지식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이론적 연구 주제로서
문화 번역의 영역을 확장하는 작업이다“(p.48).
다시금 문화연구자로서의 나를 벼려봐야겠다. 나는 어떤 편견을 갖고 지식을 구성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좀 다시 살펴봐야겠다. 선생님의 성실함에 다시 흠뻑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