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어른들의 청춘예찬을 들어야 할까?? – 강상중, 고민하는 힘

고민하는 힘6점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사계절출판사

난 원래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인생’에 대해 논하거나 ‘성공’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 도망가는 편이다. 그런 ‘보편적 섭리’ 따위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종 읽을 때가 있다. 그건 저자에 따라서이다. 이를테면 오프라 윈프리의 말은 종종 경청할 필요를 느껴서 읽었었고, 힐러리 클린턴과 오바마의 ‘자서전류’는 좀 읽은 편이다. 거기에는 그래도 팩트는 있으니까.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나 ‘비밀’ 따위를 알려주는 책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고민하는 힘="">에 대한 인기가 2008~9년에 깨나 있을 때에도 이 책을 읽지는 않았었다. 강상중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리엔탈을 넘어서="">라는 책의 저자라는 것, 그리고 나름 알려진 도쿄대의 ‘자이니치’ 지성이라는 말을 듣고 좀 끌렸다. 우석훈은 강상중이 ‘마케팅’을 잘 한다고 했었는데 그 의미를 많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고 어쨌거나 <고민하는 힘="">을 읽었다. 어차피 요즘 마음이 심란해서 두꺼운 텍스트를 읽기엔 상태가 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워밍업 하는 차원이었다고 할까? </p>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읽어본 것 같고, 나쓰메 소세키의 책은 읽어본 것이 없다. 막스 베버 이야기는 정치학을 공부하던 시절 늘 맑스와 비교되면서, 그리고 그의 ‘3 types of legitimacy’라는 주제로 좀 들어봤었다. 여전히 베버는 좀 읽고 싶긴 하고 나쓰메 소세키고 읽고 싶은 소설가이기도 하다. 강상중은 이 둘을 세기말, 자본주의가 주는 ‘우울증’을 이해했던 이들로 표현한다. 그리고 소세키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로 주요 서사를 이끌고 간다. </p>

여기저기서 ‘실존주의’ 냄새가 나고, ‘고민하는 나’에 대한 예찬이 이어진다. 고민하기에 ‘청년’이고 ‘청춘’이고, 그 ‘청춘’이 무기력한 것이 현 시대의 위기고 이게 극복이 안 되면 ‘일본’에도 ‘미래’가 없고. 그의 말들 중에 하나 하나 곱씹어봐서 틀린 말들은 없고, 그의 입장이 특별하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의 글의 결에서 나는 20대들보다 더 왕성한 체력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는 장년의 목소리를 듣는다. 강상중의 브리콜라주에 대한 이야기, craft, 손으로 만지는 감각의 중요성을 느끼면서도 사이버 공간을 이미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세대와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답함을 느낀다. 한국의 경우 매니저맘의 자녀 ‘탈색된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의하면서도 그들과 어떻게 대화할 건가의 문제에 대해 ‘정공법’으로 자신의 입장의 ‘올바름’이 이길꺼라 생각하는 완고함을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을 60대의 주류 중의 주류가 말한다면 ‘강상중’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여기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이니치이고, 도쿄대 교수이면서도 여전히 계속적인 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자신의 한국식 이름 ‘강상중’을 구태여 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다. 하지만 난 여기서 오히려 ‘입지전적 인생’을 살았던 이들의 성장 후 이야기를 듣는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김대중이 연상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안 그래도 강상중은 <반 걸음만="" 앞서="" 가라="">라는 책을 썼다. </p>

문제는 강상중이 제기하는 것과 동일하더라도 ‘해결’은 어차피 ‘청춘’들의 다른 방식의 돌파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가 정교하되 여전히 ‘대안’의 구심점이 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결국 나는 ‘스스로의 목소리’라는 문제를 찾다가 이 책을 덮고 만다. 여기서 찾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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