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수 없는 용산,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 – 김성희 외, 내가 살던 용산

내가 살던 용산10점
김성희 외 지음/보리

2009년 1월 20일. 나는 군 복무 중이었다. 뉴스에서 불타오르는 망루와 철거민 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생존자들이 구속되었음을 확인했다. 물론 나도 분노했다. 안 그래도 2009년 큰 고모가 “이러다가 폭동 날 것 같다.”라고 말했을 때 묘한 기분이 있었다. 하지만 난 그 당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다. 잘나빠진 군인사법 덕택이었다. “군인의 정치적 중립” 조항. 난 그 때는 정권에 대해 화내기 어려웠다. 그리고 근무는 계속 진행되었고, 그냥 몇 번의 ‘열받는’ 경험 중에 하나로 ‘용산’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갔다.

생각해 보니 그 이후로 용산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 결혼식이라도 근처에 있었다면 아마 가봤을 법 한데, 결혼식도 없었다. 집회는 군대에 있을 때는 군인이라는 핑계로 못 갔고, 제대하고 나서는 대학원 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못했다. 뉴스에서 3,000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공개하네 마네 하고 이야기할 때에도 그냥 한 발 떨어진 관전자의 입장에서 정부를 비판했다. 용산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동정’ 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살던="" 용산="">을 봤다. 몇 년 만에 만화를 본 거다. 서점에서 이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한 부를 집어 쇼핑백에 넣는 내 행위는 어쩌면 ‘면피’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든 이 책을 좀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그들과 ‘전철연'(우파들은 전철련이라고 읽는다)을 단순한 ‘빨갱이’의 시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읽어내고 그리고 ‘보상비’ 좀 더 받으려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하는 시선이 많은 지금을 볼 때 더 그렇다. </p>

6편의 만화들은 투박하고 구태여 에둘러가지 않는다. 삶의 터전을 빼앗겼을 때 그 공간의 구체적 경험들에 대해 손쉽게 ‘철거민’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조차도 사실은 문제다. 그들은 ‘철거민’이기 이전에 가족이 있었고, 각각의 공간은 ‘철거촌’이기 이전에 ‘삶의 공간’이었다. 용산 4구 사람들의 공간에는 손님들을 치러내기 위해 장사를 했던 땀방울들과, 그 때 사람들이 느꼈던 뿌듯함과 좌절과 다시 재기하는 마음들이 여러가지 결을 따라 누적되어 있다. 야구를 하는 아이를 뒷바라지 하는 아빠의 고민과 담배연기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공권력과 결탁한 조합권력은 늘 하던 방식으로 ‘신속’하게 일을 마무리한다. 거기에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없다. 그들의 구체적 경험들의 자리는 없다. 공권력이 원했던 것은 신속한 ‘행정처리’와 ‘재개발’이었지만, 그들이 빼앗기지 않으려 그토록 애썼던 것은 자신들의 ‘삶’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처절하게 항전할 수밖에 없었다.

1988년 서울에서만 72만 명의 세입자와 ‘불법’주택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올림픽 기념으로 그들의 보금자리를 철거당하고 쫓겨났다. 그들은 점점 서울 변두리로 가고 또 변두리에서 서울 외곽의 성남과 하남 등을 전전하며 처음에는 셋방에서 시작하여 점차 비닐하우스로 ‘몰락’하고 있다. 슬럼은 점차 확장되고 삶이 부서지는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그들의 삶의 ‘기억’들은 계속 잊혀져 간다. 메트로시티즌의 욕망 안에서 그리고 ‘아파트’에 대한 열망 안에서 사라져 간다. 하지만 ‘시작하는’ 삶들에게 도시는 ‘메트로시티즌’과 ‘아파트’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늘 불안한 ‘보금자리 상실의 공포’밖에 없을 수도 있다. 뉴타운은 늘 그들을 ‘법 밖의 시민’, 그리고 ‘경찰력 밖의 시민’으로 만들어 낸다. 계속 ‘바깥’으로 쫓겨날 공포가 그들을 어느 순간 사로잡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기억’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서울의 근래 50년의 역사는 늘 그들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다시 새로운 ‘도시의 단꿈’을 심는 과정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용산’을 쉽게 잊고, 그 전의 많은 ‘철거민’들에 대한 기억들을 잊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회복’을 위해 이 책을 권한다. “거기에 사람이 있다!”

정부와 유족들은 어느 정도 선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지만, 그것들은 이들의 아픔을 얼마나 치유했을까. 그들은 누군가에게 ‘위로’ 받긴 했을까.

<출처 : 손병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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