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20대 아티스트는 죽을 수밖에 없을까 – 김사과, 풀이 눕는다

풀이 눕는다10점
김사과 지음/문학동네

“나도 나이를 먹는다”는 말. 너무 비겁하다. 어쩌면 나이 말고 내 몸속을 가지고 있는 속물이 스물스물 기어다니다가 뇌의 신경계 하나를 접수했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이해해보려 한다는 말. 쉽게 뱉었지만 난 그들을 ‘정말’ 이해하려 하거나 공감하려 했었는지에 대해 돌아봐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를 읽으면서 난 처음에 내가 ‘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것도 없이 하루 하루의 노동, 그리고 남는 시간에 있어서의 창작. 거기에 쥐어짜서라도 만든 시간에 이루어지는 사랑. </p>

소설속의 ‘나’는 언젠가 내가 만났던 아이와 너무나 닮았었다. 속물 덩어리 강남 압구정 현대나 한양, 혹은 새로 지은 주상복합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서 자란 아이. 엄마는 부동산으로 돈을 벌고 아빠는 그냥 저냥 벌어먹고 산다. 그 속물이 싫어서 그녀는 저항하고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녀의 글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늘 압구정 로데오가 만드는 ‘국경’을 뛰어넘고 싶어했다. “씨발. 존나 구리잖아.“라고 외치는 그녀가 귀여웠고 나는 그녀의 곁에서 아방가르드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보그 걸="">이 구현하는 세계 바깥으로 온전히 빠져나가지 못했고 종종 등장하는 그녀의 말과 움직임에서는 압구정이 재현되곤 했다. 그녀는 그걸 저주했다. 하지만 결국 국경을 넘지 못했다. 그녀는 ‘그럭저럭’ 산다. </p>

쇼핑이 끝나고 우리는 근처의 비싼 식당에 가서 비싼 파스타와 피자를 먹었다. 돈은 크리스티나가 냈다. 크리스티나는 나와 풀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그리고 난 그녀가 싫었다. 그녀가 눈을 반짝 빛내면서 자기는 예술가들을 너무나도 동경하고 그들의 삶이
너무나도 존경스럽고 그들의 용기와 열정에 언제나 크게 인스파이어드된다고 말했을 때 내 마음이 살짝 움직였던 것도 사실이고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까지 좋갔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모두를 쉽게 용서하기에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녀의 표정과 표현은 너무나도 매끈해서 가짜 같았다. 만약 그게 그녀의 진심이라면, 미안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좀 슬퍼졌고, 아마도 나는 그런 슬픈 기분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pp.130-131).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그녀에게 ‘풀’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가 사귄다는 ‘풀’이 아방가르드였을 수도 있다. 걷다가 만난 남자. 걷다가 무작정 집까지 따라가서 사랑하게 된 남자. 난 ‘풀’이 되고 싶었지만 소설속의 ‘김권’과 같은 사람이었다. 예술에 대한 아는 척을, 세상 돌아가는 일의 섭리를 아는 척 지껄이곤 했다. 난 결국 ‘문화자본’을, 신자유주의가 작동하는 이 세계에 필요한 ‘경제자본’에 대한 욕망을 늘 꿈꿔왔다. 그걸 들키기 싫은 외피로 아방가르드인냥, 글쟁이인냥 살아왔을 수 있다. 다시 나를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

소설속 ‘나’의 엘에이에 가고 싶어하는 꿈처럼 나는 늘 런던을 꿈꿔왔다. 골목길 아이들의 거친 욕설이 좋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영화 <더 퀸="">에 나오는 잘난척 하는 상류층의 삶을 런더너의 삶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 김사과는 자신의 껍질을 과도로 벗겨내지만 오히려 읽고 있는 내가 벗겨진다는 기분이다. 내 안의 속물을 발견한다. 그 ‘속물’이 어떤 거냐는 둘째치고. </p>

이 세계가 그런 속물의 욕망 바깥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 말하는 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김사과는 이 세계가 주는 그 잔인함을 너무 잘 보여준다. 잘 나가는 요즘 말로 하자면. 20대가 ‘속물 가족'(혹은 중산층 정상 가족) 바깥으로 나왔을 때 ’88만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라고 해야할까.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그 이상을 원했다. 그래서 자꾸만 다른
것들이 필요해졌고 점점 더 나는 균형을 잃어갔다. 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랑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게 그해 가을 내가
도착한 곳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빈곤에 도착했다(p.152).

난 말이야. 돈을 벌 능력이 없어. 농담하는 거 아니야. 나한텐 그런 능력이 없어. 불가능해. 다들
돈을 벌잖아. 그런데 나는 도저히 할 수가 없어. 생각만으로도 막 죽을 거 같애.
알아, 이런 기분? 너는 모르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많이 노력해봤어. 그런데 안 돼. 지금에 와서 그런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도 나름대로 많이 힘들었다는 거야. 나 스스로 충분히 고통스러웠다고(pp.156-157).

‘행복한 가난’을 유지한다는 거. 그 개뼉다귀 같은 말. 지금 내 주위에 고군분투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게 과연 어떤 본질적인 어떤 걸 찾는 말로 과연 알 수 있긴 한 걸까. 그리고 그 말들을 뱉어내는 ‘우리 바깥’의 그 인간들은 도대체 우리를 알기는 하나. 과거와 미래 없이 현재만을 위해 살고 싶은 사랑을 위해 지금 당신들이 우리에게 그려주는 건 뭔가. 아니 그려달라고 부탁도 안 했다. 제발 살 수 있게 내버려는 둬야하는 거 아닌가.

끄을음이 들린다. “부자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돈이 아니야. 부자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거지야. 그런데 위기가 찾아오면
거지가 늘어나지. 그래서 부자들은 위기를 사랑해.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어. 그들이 원하는 건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거야. 그래야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세상이 위기로 넘치는 거야”(p.278).

결국 그 ‘위기’ 덕택에 황보령의 노래를 들으며 아침을 맞던 옥탑방 커플에게 벌어진 일들은 지금 알량한 ‘메트로 라이프’를 선택한 바깥의 모든 ‘위기의 커플’에게 닥치는 일들을 보여준다. 담배를 피웠는데 맛이 없다. 계속 뒷 맛이 쓰다. 그건 신자유주의 시대, 모든 걸 알아서 책임지라면서 기준을 늘리는 세계 때문일까. 아니면 계속 그 세계의 살아남는 ‘도시형 인간’이 되고 싶은 내 속물성을 발견해서 일까.

김사과의 모든 묘사들을 다 훔치고 싶다. 서늘하고 어디선가 끼이익 소리를 들을 것만 같이 오싹하다. 그 오싹함이 귀신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괴물’과 내 바깥의 세상이 날 괴물로 만드는 소리 때문이기 때문에 더 서늘하다.

내가 만났던 그 아이가 ‘나’처럼 파멸할까봐 겁나고, 내가 그녀에게 ‘풀’인척 했었을까봐 겁이 난다. 아니 어쩌면 그 순간에 ‘풀’이 되고 싶었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 김사과의 소설을 읽는 나는 ‘김권’인 거 같아서다. 나는 ‘풀’이 될 수 있을까.

김사과의 <미나>를 읽어봐야 겠다. 김애란을 좋아했었는데, 김애란의 방의 묘사가 좋았는데, 김사과를 읽고나니 김애란은 미지근하다는 생각이 든다(2008/11/06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문학] – ‘엄마의 달콤함을 기억하는 그녀’의 자취방에 들어가고 싶어 – 김애란, 침이 고인다)
. 사실 김애란의 방에 들어가려면 한 달에 30 이상에 보증금 1000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김사과의 ‘나’와 풀이 살던 옥탑방은 보증금 없이 월 30이면 될 것 같아서일까. </p>

그리고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를 읽을 때, 난 압구정 가로수길 커피숍에서 구태여 드립커피를 만 원씩 주고 내어먹는 어떤 사람이 자꾸만 떠올랐고 그게 중산층 가정의 ‘앞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었다(2010/01/24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문학] – 잘 가다가 ‘알만한’ 가족극으로 왜 빠졌을까. – 정이현, 너는 모른다
). 김사과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너는 모른다="">의 ‘은성’을 구체적으로 잘 본 것만 같다. <풀이 눕는다="">의 ‘나’와 <너는 모른다="">의 ‘은성’은 너무 닮았다. 하지만 정이현은 ‘은성’을 결국 가족의 결계에 가뒀고, 김사과는 ‘나’를 장렬하게 파멸하게 만들었다. 꼰대의 가족주의와 20대 당사자의 아방가르디즘이라고 해야할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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