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랑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의 자세- 500일의 썸머 (2010)

500일의 썸머10점
마크 웹

500일의 썸머
감독 마크 웹 (2009 / 미국)
출연 조셉 고든 레빗, 조이 데이셔넬, 패트리샤 벨처, 레이첼 보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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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 – 이제 막 연애를 끝낸 모든 이들에게

주의 : 스포일러 有

2010. 1. 28. 12:00 아트레온에서 <500일의 썸머>를 봤다. 혼자 영화를 보러갔고, 5관 G5자리에 앉았다. 뒷 줄에는 친한 친구로 보이는 두 남녀가 있었고, 나중에 몇 명이 더 들어왔다. 영화관은 한산했다. 좀 일찍 도착했기에 밝은 조명에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읽었다. 뒷 줄의 두 남녀는 징그럽게 떠들어 댔다. 남자가 올해 들어오는 신입생 10학번이랑 자기랑 이제 7살 차이라는 걸 보니 03학번인가 보다. 아직 졸업을 못했고, 여자는 무슨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2월 2일에 발표라는 걸 보니 달력을 뒤지면 뭔지 알 수도 있을 듯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그들의 대화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소설에 몰입하기 시끄러웠단 이야기다.) </p>

12시 정시가 되자 조명이 꺼지고 종치는 소리가 났다. 고등학교 이후 처음 듣는 차임벨 소리가 좀 신기했다. <퍼레이드>를 덮고 화면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난 왜 <500일의 썸머>를 봤을 까. 그건 순전히 어떤 사람이 이 영화를 매우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p>

“이 이야기는 연애 이야기”가 아니란다. 그리고 곧 이어 “Bitch.”가 단말마로 스크린에 찍힌다. 카피 라이터 회사에 비서로 들어온 썸머. 그에게 홀딱 반해버린 탐.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니 영화는 시작과 끝을 시간 순으로 가지 않는다. 500일을 기준으로 넘나든다. 처음과 끝이 넘나들며 중앙쯤에서 만났을 때 이야기는 그제서야 끝을 향해 간다. 탐은 호시탐탐 건수를 노리다 어느날 파티에서 그녀와 대화를 시작한다. 그녀는 ‘친구’를 이야기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러겠다고 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전형적인 ‘연애담’으로 가는 듯하다.

사랑을 주체 못하는 남자. 아직 ‘사랑’을 믿지 못하는 여자. 남자는 늘 관계의 뒤틀림을 자신의 ‘부족’으로 생각하고 ‘회복’의 건수를 그리고 ‘노력’을 보이려 한다. 남자는 전형적인 을의 입장에 있다. 여자는 운명적인 사랑을 믿지 않는다 말하고 남자는 자신의 사랑이 ‘운명’임을 각인시키고 싶어한다. 마치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에게는 여자와의 기억 모두가 상징이었고, 첫 번째 준 음악의 트랙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라 말하지만, 여자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좋았던 일 들 중 하나’일 따름이다. 그 만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간에 ‘I love you’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p>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 ‘I love us’와 ‘You make me proud’를 입에서 쏟아내던 남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남자는 이제 지옥을 맛 본다. 아니 영화의 바깥에서 을의 관계의 모든 사람은 그렇다.

그들의 사랑은 어느새 ‘시효만료’에 다다른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의 어떤 ‘여지’를 늘 발견하려 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다가오는 것은 ‘엇갈린 인연’일 수밖에 없다.’자연의 섭리’는 결국 ‘우연’의 편을 든다. 사랑을 믿지 못하는 썸머는 ‘운명적 사랑’을 다른 장소에서 만나고 결혼을 한다.

그 누구도 실수하지 않았다. 누구도 나쁘지 않다. 특별히 더 ‘착한’ 혹은 ‘정당한’ 사람은 없다. 그냥 끝났을 뿐이다. 그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아린, 누군가에게는 조금 더 미안한 감정. ‘I like you.’라고 말하는 갑. ‘I love you.’라고 말하는 을. 거기엔 권력관계가 있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 권력관계는 곧 바로 젠더관계인 것도 혹은 어떤 ‘바람둥이’의 재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거기에 연애의 복잡다단함이 있지 않을까.

결국 문제는 그 ‘우연’이라는 것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말고 “새로운 관계(사랑)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소통방법을 늘 조금씩 알아가는 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나 역시 썸머를 만난 것 같았고, 또 나 역시 누군가에게 썸머였던 것 같지만.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이제 좀 그만하고 싶다. 나를 “나쁜 새끼”라 불렀을 그녀들과 내가 “나쁜 년”이라 불렀을 그녀들. 모두 서로에게 얻는 게 뭔가는 있지 않았을까.

뱀다리.
‘Belle and Sebastian’과 ‘the Smiths’의 이름이 나왔을 때 전율했다~ 그리고 조이 데이셔넬은 정말 ‘사랑’하고 싶은 여자였다.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