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위태하지만 안정적인 그들의 동거 이야기 – 요시다 슈이치, 퍼레이드

퍼레이드8점
요시다 슈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은행나무

21살 대학생 스기모토 요스케, 23살 백조 오코우치 고토미, 24살 잡화점 직원 소우마 미라이, 18살, 밤에 하라주쿠를 전전하는 고쿠보 사토루, 영화 홍보일을 하는 28살 이하라 나오키.

5명의 20대가 한 맨션을 나눠서 산다. 남자 셋, 여자 둘. “현관을 들어가면 먼저 오른쪽에 화장실이 있다. 짧은 복도를 지나 왼쪽에 주방이 있고, 그 옆의 문을 열면 남자 방이다. 남자
방에는 내가 사용하는 파이프 침대가 있고, 요스케는 그 아래에 이불을 깔고서 잔다. 남자 방 안에 있는 섀시 문을 열면 베란다가
나온다. 언제나 누군가의 빨래가 널려 있고 구형 세탁기 안에는 반드시 양말 한 짝이 남아 있다. 남자 방을 나오면 두 평쯤 되는
거실이다. 남쪽은 전면이 창인데다 바로 아래에 고슈 가도가 있어 다소 소음이 거슬리긴 하지만 햇빛이 잘 들고 천장도 높았다.
거실을 빠져나가면 여자 방이다. 원래 이 두 평이 조금 안 되는 양식 방은 나와 미사키의 침실이었다. 그러나 미사키가 나가고 난
후에는 그 방에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방은 겨우 이 것밖에 없다.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큼 훌륭한 맨션도 아니고, 이사가기 싫을
만큼 애착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는 그런 맨션에서 우리 다섯 사람은 살고
있다
“(pp.297-298).

그들은 거실이라는 공간을 공유한다. 강하게 두 번, 약하게 한 번 두드리면 화면이 돌아오는 고물 TV와 요스케가 선배로 부터 받아온 탈수와 세탁이 동시에 되지 않는 세탁기를 함께 사용한다.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각각 5장으로 나누어 들려준다. 5명 서로의 위치는 조금씩 다르다. 원래 집의 점유자(?)였던 나오키는 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 맨션을 임대했었고, 거기에 미라이가 들어오던 순간, 고토미가 들어오던 순간, 요스케가 들어오던 순간들은 모두 우연찮은 이유에서였다. 각자에게는 나름의 맥락의 희노애락이 있고 이는 완전히는 공유되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대화가 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하기 때문인 거고, 그러면서도 완전히 친해지지 못하는 건 오해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해라 말하기는 좀 그렇다. 특별히 다 ‘이해’ 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태여 ‘완전히’ 이해하려거나 자신을 ‘완전히’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서로는 거실에서 서로 투닥거리고, 종종 서로의 고민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건 어쩌면 ‘연극놀이’ 같은 것이다. 미라이는 그걸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 살고 있는 나는 틀림없이 내가 만든 ‘이 집 전용의 나’이다. ‘이 집 전용의 나’는 심각한 것은 접수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의 나는 이 집에 존재하지 않는다“(p.133). 고토미 역시 그렇게 느낀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도 그런 장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싫으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있을 거라면 웃으며 생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인간인 만큼 모두들 선의와 악의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 미라이도
나오키도 요스케도 여기서는 모두 선인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내게는 이 정도가 딱 좋다. 물론 이런 생활이
평생 지속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기간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순조로울 수 있고 나름대로 의미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p.97).

5명은 같이 모여 외식도 하고, 같이 오락도 하고, TV프로그램을 보기도 하고, 포르노를 같이 보면서 비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들이 왔을 때 그들은 그 문제를 풀지는 못한다. 그저 각각 ‘대응’을 할 따름이다. 나오키의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은 그냥 무심할 따름이다. “소파에 앉은 요스케가, 사이좋게 나란히 앉은 고토와 사토루가, 텔레비전 앞에 서 있는 미라이가, 나를 무시하고 웃고 있다. 아직
심판도 용서도 받지 못한 나는 그대로 입구에 세워져 있다. 마치 그들이 나 대신 이미 후회하고 반성하고 사죄한 것처럼. 네게는
아무것도 줄 수 없어. 네게는 변명도 참회도 사죄할 권리도 주지 않을 거야. 왠지 모르게 나 혼자만 이들 모두로부터 몹시 미움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p.302). 서로는 공유의 순간이 영원하리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같이 사는 것이 불편하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

이제 이쯤에서 뭔가 ‘본질적인 이해’ 따위를 말하는 논의로 가기 시작하면 이들이야 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파편화된 인간의 극한’이라 표현하면서 ‘동정’의 시선을 보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달리 생각을 해보면 ‘끈끈한’ 관계야 말로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가. ‘자신의 공간’을, ‘자신의 방’을 갖지 못한 이들은 과연 ‘살고’ 있긴 한 걸까? 우리는 소통을 해야한다. 그리고 뭔가를 나누고 ‘상호의존’하면서 살긴 해야 한다. 하지만 ‘연극적인 삶’ 바깥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가식’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을까. 서로에 대한 ‘예의’라는 것도 사실은 ‘연극적 장치’가 아닐까. 화가 나면 그냥 화를 내고, 웃기면 그냥 웃고, 그걸 구태여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는 게, ‘진실한’ 관계라는 게 더 ‘좋은’ 관계가 될까? 그런 ‘진실함’이 누락되었기 때문에 더 ‘안정적’이라면 좀 달리 검토해봐야 하는 건 아닐까. 오히려 현대의 ‘혈연 가족’이야 말로 ‘연극놀이’의 절정은 아닐까. 외려 정말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일촉즉발’일 것 같은 불안정이 어느 정도의 ‘무심함’과 만났을 때 안정적인 동거를 만드는 역설.

‘쿨’과 ‘핫’한 관계에 대해서 종종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퍼레이드>의 시트콤적 상황들은 지금 사람들의 일상과 어떤 온도로 만나고 있을까. 사실 끈끈한 관계야 말로 ‘자본주의적’ 연대감은 아닐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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