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가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 리처드 르뮤, 샐리의 따뜻한 아침식사

샐리의 따뜻한 아침식사8점
리처드 르뮤 지음, 김화경 옮김/살림

신촌역에서 학교로 올라가는 길. 반백의 머리는 이미 산발이고 한 10년 전 쯤 유행했을 것 같은
나일론 파카를 입고 녹색 바구니 하나를 끼고 커피 전문점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할머니를 본다
. 늘 그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팔로 때리고 구걸 한다
. 그녀와 이야기해본 사람들은 없는 것만 같다. 그녀를 피하거나 그녀에게 적선하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다. 그냥 중얼중얼 하기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
.

 

서양에는 ‘바바리안’이라는 말이 있다. 야만인을 뜻한다. 그 말은 ‘버버버버’의 의성어이다.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문명화’시키려고 노력하곤 했다. 현대에 ‘바바리안’은 사라진 것일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이미 서울역 근처에 살고 있는 노숙인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 신학을
공부했던 주원규라는 소설가의 『열외인종잔혹사』는 그러한 노숙인들의 눈으로 본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
노숙인들의 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 서울역에 있는 이들은 분명 한국어를 쓸 테지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21세기의 ‘바바리안’이다.
누구 말마따나 ‘예외’ 빼고 나머지는 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생각을 해보자. 어느
날 갑자기 ‘별일 없이’ 살다가 아무도 자기의 목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 당신에게 보이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 당신에게 들리는, 만져지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 리처드 르뮤는 그 세계를 생생히 보여준다.
재산을 탕진하고 남은 건 오로지 곁을 지키는 강아지 ‘윌로우’와 차 한 대
. 그나마도 가스를 넣을 돈
조차 없다면
. 매번 노숙인들에게 하는 봉사활동에 ‘이발’이 왜 빠지지 않는지도 리처드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잘 이해가 된다
. 20달러짜리 수표를 은행에 바꾸러 가도 ‘신원조회’가 되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 ‘별일 없이’ 사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건 그냥 입지전적으로 출세한 사람의 ‘성공담’이 아니다. 세계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가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생생한 ‘생존기’이자 ‘회복의 이야기’인 것이다
.

 

르뮤는 그나마 C(아마 난 이 C Christ
아닐까 생각한다
) 만나 제 때 차에 가스를 넣을 돈을 받고, 샐리의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살 수 있었다. ‘회복’의
가능성을 잃지 않은 것이다
. 덕택에 책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되는 게 있다
.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영화 <솔로이스트>에서
기자 로페즈는 노숙인 나다니엘이 원치 않아도 도우려 했다
. 친구가 아니라 어느 순간 봉사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것을 종종 망각한 ‘봉사’는 그들에게 폭력이 된다.
그들의 목소리를 먼저 듣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의 길을 열어주는 일. 일단 좀 듣자.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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