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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친척, 그리고 적대감과 하위문화
내 온 몸에는 독이 서려있었다. 지금도 완전히 독을 빼지 못한 채 주화입마 상태만 겨우 막은 지경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 독의 정체는 뭔가를 좀 들여다볼 수 있는 한 동안이었다.
- 작은 고모집 두 아들과 나
11살, 12살 때쯤이었다. 중국으로 둘 째 고모네가 이사를 했다. 당시 중국과 수교를 맺고 중국이 신흥 시장으로 각광받기 시작할 때이고 91~95년 이 쯤에 갔던 한국의 기업가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그들은 대체로 성공적으로 중국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한국에서 누리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점에서 윤택했다. 내 고모네 가족도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였다. 고모네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애, 그리고 나보다 한 살 많은 남자애가 있었다. 고모네는 이사가기 전 안양, 안산, 산본을 왔다갔다 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집이 훨씬 더 잘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모는 처녀 때 미군 PX에서 물품을 받아다 납품을 하곤 했었고 고모부 역시 그러한 일을 하다가 80년대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가죽 제품을 가공하는 수출업체로 취직을 했다. 그들의 학력은 모두 중졸이었다. 전라도 담양에서 상경한 고모, 대전에서 상경한 고모부. 그들은 어쨌거나 타이밍을 잘 맞춰서 먹고 살 만해졌다. 그 집의 아이들은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다. 그 아이들과 만났을 때 나는 “고래사냥”의 음란 버전 노래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20살 언저리가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북경대에 입학을 했다. 난 원래도 그들을 좀 싫어했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녀석과 싸워서 줘 팬적이 있고, 나보다 한 살 많은 녀석한테는 개기다가 죽도록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근데 싸웠던 이유는 그들이 돈 많다고 잘난척 하는 그것 때문이었다. 90년대 이후 그들은 늘 우리집보다 훨씬 잘 살았으니까. 난 13살에 피자를 처음 먹었는데, 그들은 피자헛의 치즈크러스트 피자를 먹었다고 말했었다. 정말 재수 없었던 것은 팔 순이 넘은 할머니가 그들이 한국에 놀러왔을 때 음식을 만들어줬는데 그들이 그거 맛없다고 밥상을 외면하고 나가서 맛있는 거를 먹고 왔다고 자랑할 때였다. 그냥 그들과 부딪히면 내가 싸움을 잘하건 못하건 일단 들이받게 되곤 했다.
- 큰 고모 그리고 힙합
큰 고모는 처녀 때 신앙촌 물건을 팔곤 했었다. 8남매의 둘째로서 첫째 큰아빠의 때이른 타계 이후 미혼이었던 남매들 가계의 생계를 온전히 맡게 되었다. 전국 웅변대회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우승을 했던 큰고모였지만 전라도 담양의 가난은 어찌할 수가 없었고 고모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교 경험의 마지막이었다. (물론 나중에 검정고시와 독학사로 대졸이 되었다.) 고모는 동생들 뒷 바라지를 하느라 35살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 금은방을 하는 큰 고모부는 딸 넷이 있었고 부인과 사별한 상태였고 고모는 그집에 ‘시집 가서’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다시금 8남매의 정신적 물적 지주가 되었다. 천호동 코오롱 아파트에 살았고 난 늘 그 집에 놀러가면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집의 나보다 한 살 어린 아이는 언제나 최신의 게임기 팩을 갖고 있었고, 컴퓨터를 가장 먼저 샀고, 그 집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있었다. 그 집의 막내 누나는 내게 피아노를 자주 가르쳐 주곤 했다. 그집에 놀러가면 늘 별천지에 간 것만 같았다. 7살~10살 사이 난 성내동의 이모집에 들렀다가 늘 큰고모집에 놀러가곤 했다. 근데 그집의 동생은 내게 잘난척 하지 않았다. 난 그집이 늘 부러웠다. 내 부모에게 “나도 xx처럼 가르치면 서울대 갈 수 있었다고!” 혹은 “나도 집에 xx네처럼 피아노가 있으면 음대갈 수 있었다고!”하고 외치곤 했다.
그 아이는 늘 자유로웠다. 그 아이는 피아노도 잘 쳤고, 그림도 잘 그렸고 공부도 잘 했다. 그의 그림은 늘 밝았다. 찌들어 있는 뭔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고 그는 슬슬 공부를 내려놓았다. ‘비빌언덕’이 있다는 말을 내게 어느 날 부터 담배를 나눠 피울 때마다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부터 힙합음악을 시작했고 래퍼가 되었다. 난 그의 음반을 사서 늘 듣곤 했다. 그를 보면서는 특별한 적대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내 가족의 ‘경제적 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나를 지지할 수 있는지를 늘 떠올리곤 했다.
- 진보주의자 작은 아빠와 <한겨레>한겨레>
10대에 내게 가장 무서운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첫째 작은 아빠였다. 그를 만날 때에는 일단 걸음거리를 단정히 해야했고, 서태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었고, 랩을 하면 안 되었다. 물론 춤을 춰서도 안 되었다. 늘 그는 책을 들고 다녔다.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라는 박세길의 책을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읽었던 것도 그의 덕택이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부터 책이라는 것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사 책들을 읽는 것을 그는 칭찬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해보면 늘 <한겨레>를 들고 다녔다. 술도 잘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늘 책만 읽고 집에 7시면 퇴근하는 그는 정말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 후 12시까지 책을 읽다가 6시에 일어나 7시에 출근하는 사업가. 그는 내 아빠 때문에 중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마쳤다. (그도 역시 검정고시와 독학사 및 여러 과정을 거쳐 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늘 그는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름이 바뀌고 있는 그 정당을 욕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전라도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는 늘 ‘무식한 민중’을 욕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그가 내게 쥐어준 것은 <박정희를 넘어서="">(한국정치연구회)였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얼마나 왜곡의 역사였는지를 내게 늘 가르쳐주었다. 내 입장이 ‘좌파’로 결정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또골또골하다”라고 말했다.박정희를>한겨레>다시>
그 집에도 아이는 있었고 그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 아이는 어렸을 때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늘 부르고 “독도는 우리땅”을 부르고 다녔으며 가요를 부르면 “미제 노래는 부르면 안돼!” “미국놈들이 광주 사람들을 다 죽였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늘 그의 아빠의 주니어로서의 완전한 의식화가 되어보였다. 깡마른 몸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는 그는 아버지와 같았다. 하지만 사춘기가 좀 지난 언젠가부터 아빠를 배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말그대로 great negation! 엄청난 거부였다. 그는 20대를 우파로 지내고 있다. 아빠에 대한 저항감과 함께.
난 유들유들하게 살아남아 <인물과 사상="">을 들고다니는 “또골또골”한 놈이 되었고 그와 잘 지낸다. <한겨레>를 구독했고, 20대에 민주노동당을 지지했었고, 진보신당 당원인데다가 한나라당을 그 못지 않게 저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귀를 뚫었을 때, 그리고 염색을 했을 때마다 작은 아빠에게 타박을 듣곤 했다. 난 <문화과학> 그룹의 담론으로 그에게 저항하곤 했다. “내가 더 급진적이거든요.”문화과학>한겨레>인물과>
- 적대감
난 내가 살았던 동네에서 적대를 배우지 않았다. 내가 느꼈던 것은 늘 몸을 써서 하는 활동에 있어 슬로우-스타터기 때문에 남자들 사이에서 자주 줘터지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 고모들의 아이들과 작은 아빠의 아이를 보고 있을 때는 늘 ‘다른 계급’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떠올려야만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은 내게는 늘 폭력으로 다가왔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늘 누리는 아이들과 구태여 섞여서, 그리고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난 면대면으로 부대껴야 했다. 4만 5천원짜리 리복 운동화 한 켤레를 사기 위해 동네 한 복판에서 울며불며 노래를 불러야 했던 내게 10만원이 넘는 에어조던과 리복 운동화, 아이다스 단화 모두를 갖고 있던 고모집의 아들들은 나와는 다른 인간이었다. 하지만 위에 말했다시피 두 고모의 아들들이 모두 같았던 건 아니고, 어딘가 모를 ‘배려’나 ‘존중’ 같은 게 있었던, 자기를 좀 내려놓고 내 말을 들어주던 큰 고모의 아들녀석과는 묘한 연대감을 느끼곤 했다. 마이너 감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20살이 되었을 때 이러한 묘한 감정들은 ‘계급 적대감’을 강하게 형성했다. 그건 스타일의 문제이기도 했고, 눈매의 차이기도 했고, 부르고 듣는 노래의 차이이기도 했고, 쓰는 말투의 차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HOT/SES와 젝키와 핑클을 듣는 취향의 차이는 너무 거칠고, 롯데리아와 KFC 그리고 버거킹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크라제 버거를 먹는 취향의 차이는 너무 세밀한 것 같다. 그 중간 쯤 어디에서 난 늘 어떤 구획선을 보곤 했다.
그런 거 다 개인차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내게는 분명한 선이 그어지곤 했다. 너무나 예리하게 단절되는 구획선은, 이상한 적대감들을, 환원주의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리고 난 ‘대학문화’라는 얼기설기한 장치를 통해 그들의 문화의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그건 정말 “뱁새가 황새를 좇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또 20대의 중반에는 ‘장교’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용한 소비문화를 통해서만 그 문화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늘 무기력했던 것은 유학을 나가있던 ‘그들’이 돌아왔을 때였다. 난 왜 거기에 구태여 그렇게 마음을 많이 쓰고 있었을까. 왜 그리 독을 뿜어대야 했을까. 어쨌거나 20대 남자들인 그들의 ‘명품 소비’에 놀랐던 적이 많았다. 그리고 곧 이어 내 옷차림을 점검하고 내 가방을 훑어보고 내 말투를 검열해야 했다. 그건 도대체 뭐였을까. 미묘한 하위 문화의 차이를 늘 나는 상처로 받아들이곤 했다. 거기에 내 끄을음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