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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인간을 읽는 시도들과 오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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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 전중환 지음/사이언스북스 |
좌파들이 꺼리는 게 좀 많다. 일단 수학을 잘 못한다(물론 뒤메닐-레비같은 맑스주의자들은 전형논쟁에서 현란한 미분 방정식을 선보이기도 한다.). 경영학은 부르주아 학문이라 싫어한다. 뭐 거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좀 치명적인 것은 자연과학 일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생물학에 대한 거부감도 굉장해 보인다. 종종 블로고스피어 일부에서 벌어지는 자연과학 전공자와 사회과학 전공자 혹은 철학 전공자들의 논쟁을 보고 있을 때, 서로 이해 못하는 건지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는 건지에 대해 분명하지 않을 때를 보곤 한다.
어쨌거나 정리하자면 내 생각에는 좌파들의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가 결코 ‘득’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공학에 대한 논쟁들에서 그 전까지 날을 세우고 있던 좌파들이 별로 할 말 없이 ‘권력관계’의 문제만 제기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로쟈의 이야기도 그러한 맥락 안에 있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인문학자의 딴죽 걸기를 기대했을) 주최 측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진화심리학에 대단히 우호적이다. 국내에
이미 소개된 로버트 라이트의 <도덕적 동물(Moral Animal)>,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The
evolution of Desire)>와 같은 책도 흥미롭게 읽었다. 진화심리학의 최신 연구 성과가 담긴 <오래된
연장통>도 열심히 읽었다.
이런 진화심리학의 연구 성과가 더 많이 소개되고, 여러 사람이 이것을 공유해야 한다. 인문학자들은 흔히 인간에게 기대를 갖고
있기가 쉬운데, 진화심리학은 이런 거품을 빼는데 기여해 결과적으로 인문학의 진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진화심리학을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 집어넣어야 한다.“
다윈주의를 자꾸만 ‘사회진화주의 social darwinism’으로 읽어내고 거기서 ‘우생학’의 징후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자연과학에 대한, 생물학에 대한, 다윈주의에 대한 오독은 아닐까 싶다. 한동안 많은 좌파들이 읽었던 과학기술학(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역시 궁극적으로 부딪혔던 문제는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한 이들에게 길을 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순전히 디테일을 잘 몰랐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중환의 책은 굉장히 쉽게 읽히고 분량도 초심자가 읽기에 적절하다. (물론 이건 내가 초심자라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오해들을 조금은 털어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유전자는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 이것마저 부정한다면 맑스주의자들은 ‘토대'(생산관계+생산력의 문제)가 상부구조에 대한 최종심급을 결정한다는 주장도 기각해야 한다. 문화의 자율성, 사회적 관계의 자율성을 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좌파들의 경계심은 아무래도 ‘인본주의’의 문제가 일차적일 것 같고, 그것을 넘어선 ‘후기-구조주의’의 영향(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을 받은이들에게는 ‘권력관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권력관계와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구체적인 주장들을 알아야 하지 않나? 또 다른 한 차원에서 ‘인간’이 아니면 존중받지 말아야 하나? 여러 차원의 비비꼬인 심통들에서 좀 벗어날 필요를 느낀다.
창조과학의 ‘지적설계론’은 우습게 생각하면서 또한 ‘다윈주의’에 대한 극도의 경계감을 갖고 있는 것, 그 입장 자체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진화심리학이든 진화생물학이든 최근의 과학조류에 대한 구체성을 자꾸만 내려놓고, 인식론의 문제로, 혹은 논리 게임으로만 구도를 재편하거나 다른 층위에서 ‘담론’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메타분석을 해대는 것이다. 그걸 넘어서야 좀 다른 ‘대항 담론’이든 ‘대안 담론’이든 가능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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