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와 다윈주의는 만날 수 있을까??

다윈의 대답 110점
피터 싱어 지음, 최정규 옮김/이음

2010/02/01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자연과학 그리고 공학] – 과학으로 인간을 읽는 시도들과 오해들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을 읽고나서 사 두었던 <다윈의 대답=""> 시리즈를 한 권씩 읽기로 했다. 진화심리학이든 진화생물학이든 매번 잘 몰라서 그냥 등 너머로 듣고 있는 게 짜증났기 때문이다. </p>

피터 싱어가 두 명이다. 국제관계 전문가 피터 W. 싱어가 있고,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있다. 지난 번에 군대 이야기에 대한 작업을 할 때 읽었던 피터 W. 싱어(2009/12/18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신자유주의적 전쟁 – 피터 W. 싱어, 전쟁 대행 주식회사)와 피터 싱어가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사람은 배워야 산다. 아니면 아예 모르는 게 약이거나.

하여간 피터 싱어의 책을 읽는다. 피터 싱어는 좌파가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무시하고 자꾸만 그것들을 사회경제적/문화적 양상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지금 이모양 이꼴이라고 말한다.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고정된 인간 본성이란 없다. 인간 본성은 생산양식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하게 된다“(p.43). “우리 인간과
인간의 조상들 사이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다윈주의란 자연의 역사에서의 진화의 법칙을 제공할 뿐, 인간 역사의
출현과 동시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지 알고 있다
“(p.44).

최종적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다윈주의자들이 자연의 불가피한 측면이라고 이해했던 욕심,
이기심, 개인적 야망, 질투 같은 것들은 사적 소유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이루어지는 사회에 살기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사회적 제도 하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적인 이해에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공공의 재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타인과 협조적으로 일하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p.49).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게 주장하는 좌파가 지금도 있나 싶다. 좌파의 기획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 시간의 종료를 선언하지 않는다. 피터 싱어가 알고 있는 좌파는 스탈린주의자밖에 없는 것 같다. 혹은 트로츠키주의자이거나. 좌파는 인간의 ‘본성’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꿔서 던지면 대화가 될 것 같다. 인간의 ‘변화하는 진화의 도정’에 있어서의 한 국면들이 ‘잠정적인 본성’이라 말한다면 그 ‘본성’들이 끊임없이 자본주의적 욕망 혹은 이기적 욕망들을 불러일으켜 다른 대안들을 만들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피터 싱어는 어쨌거나 좌파를 ‘사회경제적 관점/문화적 관점’에만 관심있는 존재들로 만들어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가 다윈주의와 만나려면 그러한 관점을 일단 내려놓으라 말한다. ‘사회생물학’적 관점으로 강하게 견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피터 싱어는 초장에 사회 다윈주의를 비판한다. “사회 다윈주의의 여러 분파들은 사실(fact)로부터 가치(value)를 유추해내려는 오류에 빠져있다. (……) 우리는
진화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 진화는 어떠한 도덕적 가치도 수반하지 않은 채, 그냥
진행된다
(p.28)”. 또한 우생학 담론 은 ‘비다윈주의적’이기 때문에 그는 비판한다. 그에게 ‘우생학’을 들이대는 것은 오류이다.

그 지점에서 피터 싱어는 우파 다윈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그가 말하는 ‘사실’들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된다.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문에 부딪힌다. 유전자는 ‘이기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인과적으로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결론이 도출 가능한가? 또 하나 인간이 ‘사람같이’ 살기 시작한 게 기껏해야 1만 년 안짝인데, 지구에 있는 생명체들의 진화의 기나긴 도정에 비하면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라는 것이 벌어지기에 만 년은 너무 짧은 시간은 아닐까? 최정규가 적절히 지적하지만. 그렇다면 그 와중에 인간의 ‘삶’이 변했다는 것은 생물학적 진화 말고 다른 요인들이 충분히 작동했다고 말할 수도 잇고 또 동시에 그 영향력이 더 컸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다가 빵 터지는 지점이 있는데. 피터 싱어는 여기서 ‘관심술’을 ‘과학’의 영역에서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보상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혹은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을 기대해서, 이렇게 동기부여되어 나타나는 행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도 이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에서 이타적 행위란 행위의 동기에 초점을
맞춘 개념이지, 번식상의 적응도에 미치는 효과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p.98).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를 구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 (……) 희생의
크기란 그렇게 크지는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발적으로 헌혈을 한다는 사실(영국의 경우 6%)을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p.99).

또 하나, 성 역할 분업의 경우에 있어서도 피터 싱어가 본 자료는 ‘시간’적으로 얼마나 장기적인 것인지가 좀 궁금하다. 선사시대에 있어서의 ‘성 역할 분업’들에 대한 자료를 피터 싱어는 갖고 있는가? 기껏해야 갖고 있는 자료가 20세기 인류학자들의 ‘원주민’ 조사에서 발견한 것이라면 그 자료를 가지고 ‘사실’을 도출하는 것은 과연 ‘과학적’일까? 그리고 그러한 시선에 바로 ‘가치(value)’의 문제가 연류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초기 인류학자들의 ‘진화주의’적 시각과 ‘전파론’적 시각에서 피터 싱어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탈식민주의적 맥락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피터 싱어는 자유로운가?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공리주의’적 관점을 협조게임의 논리로 풀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 ‘늘’ 이기적이라는 전제에 대해서 ‘진화론자’가 ‘결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재미있는 현상이다. 어떻게 진화할 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조금 더 자세한 공부를 해보고 피터 싱어의 입장에 대해서는 더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최정규의 비판적 분석 때문에 이 책은 괜찮은 책이 되었다. 피터 싱어의 기여보다는 말이다. 좌파는 어떻게 진화생물학과 만날 수 있을까? 다시 고민은 깊어진다. 어떤 다른 지점들이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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