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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 요시다 슈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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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 ![]()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은행나무 |
늘 ‘말’이 문제다. 연애관계에서 일단 그렇다. 존 그레이의 말마따나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문화적-생물학적 성차이든 아니면 어떤 이유든. 사실은 어떤 관계에서도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다르고, 그/그녀가 ‘듣고 싶은’ 이야기와 ‘듣고 있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것들이 잘 이어진다면 관계는 성공적일 테지만, 조금만 미끄러져도 관계에 있어 위기들이 발생하는 건 순식간이다. 아니 어쩌면 늘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문제는 영영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 말의 미끄러짐 말이다.
그런데 ‘말’이 없는 세계에서의 관계맺음은 어떠할까. 한 사람이 들을 수 없고 그/그녀와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 ‘글’이나 표정, 몸짓 밖에 없다면 어떤 양상이 펼쳐질까? 그리고 그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말.
적으면 적을수록 상대에게 확실하게 가닿는 말. 교코와 사귄 후로 나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p.48).
소리의 바깥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펼쳐진 세계는 어떤한 것일까? 하지만 소리의 ‘바깥’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은 오히려 다시 되묻는다.
“”당신은 귀가 들리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요’라는 말 들어본 적 있어?’
그렇게 쓴 메모를 보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늘 그런 소릴 들어. ‘당신은 귀가 불편하지만,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요’라고들 하지.'”(p.125).
그리고 그녀는 그를 치유한다.
“‘말하는 거 절반도 못 알아들을지도 몰라. 그래도 잘 들을테니까, 기분 나쁜 일은 다 쏟아내……’
교코가 새 종이에 썼다. 나는 글씨를 쓰는 교코의 손을 잡았다. 쭉 미끄러진 펜이 메모장에 긴 선을 그렸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심각한 표정을 띤 교코가 ‘응’이라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표정이 우스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거봐, 말하니까 기분도 풀리지?’
교코가 자랑스러워하듯 그렇게 쓴 메모를 보여주었다”(p.108)
꼭 많은 말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사실 어떤 관계에 대해 규정하거나 이름짓는 건 늘 쉬운일이 아니고 그 이름지음으로 그 관계가 갖고 있는 잠재성들은 종종 고갈되어버린다. 하지만 사람들은 손쉽게 남의 ‘관계’에 대해 이름붙이기를 시도한다. 마치 어떤 사람들에게 꼭 ‘별명’ 혹은 ‘호칭’을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 시선은 사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종종 폭력적으로 되고 만다. ‘소리 바깥’에 살고 있는 사람과의 연애는 사람들의 ‘시선’과 ‘웅성거림’과 아무 상관없이 진행된다. 그건 ‘연애’ 이고 ‘사랑’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서로 아파하는 순간에 마주하게 된 것은 그들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 아니다.
남자는 엄마의 편지 때문에 그녀가 상처받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어쩌면 부차적이다. 연락이 되지 않는 순간에 불안함을 느끼는 남자와 그 남자의 머릿속에 그려졌을 여러가지의 상상들을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소설을 읽고 있는 순간에 계속 내가 내려놔야 했던 건 그녀의 ‘소리 바깥’의 삶이라는 ‘특수성’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그 위태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순간에 여러 ‘말’을 보태는 것보다 정말 본심 한 마디가 나가는 것도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며 문자를 모두 삭제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보고 싶어”라고 찍고 있었다. 그 이상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