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에 대한 오해부터 내려놓아야 하지 않나

다윈 이후8점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사이언스북스

2010/02/03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자연과학 그리고 공학] – 좌파와 다윈주의는 만날 수 있을까??
2010/02/01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자연과학 그리고 공학] – 과학으로 인간을 읽는 시도들과 오해들

#진화생물학을 읽기까지

며칠 째 굴드의 <다윈 이후="">를 잡고 있었다. 책이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에세이이기 때문에 논지는 명쾌하고 간명했고 지금까지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얼마나 첨예한지를 잘 드러냈기 때문에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겨나곤 했다. 영감을 많이 주는 책이다. 굴드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오해="">를 군대 가기 전에 읽었던 적이 있다. 그 때는 “역시 자연과학도 결국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는 구나” 정도로 읽었던 것 같다. 그 이후에 읽었던 자연과학과 관련된 책들이 보통 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계통의 저자들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확인이 된다. 홍성욱 교수의 책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건 황우석 때문이었다. </p>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하게 된다. 사회생물학이나 도킨스류의 유전자 결정론을 주장하는 저자들의 주장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있지만 그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비판없이 읽지는 않으려 한다. 이를테면 2005년에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건 없거든”이라는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인문학적 관점’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인간의 진화의 도정에서 겪게된 현 단계의 속성들”이라는 것까지는 승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인정이 곧 지금의 모순들에 대한 ‘유전자 결정론’ 혹은 ‘생물학적 결정론’을 추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현재는 ‘동물’로서의 인간의 진화 도정과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제 양상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윈 이후="">를 읽으면서 진화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을 떨치게 된다. 이를테면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진화의 방향은 우발적이다. “역설적이게도 진화론의 아버지는, 생물의 변화는 생물과 주위 환경 사이에서 적응성이 증가되는 방향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구조적인
복잡성이나 이질성의 증가에 의해 규정되는 추상적인 진보의 이념은 아니라고 인식해서, 절대로 고등이니 하등이니 하는 말들을 하지
않겠다고 열심히 주장하고 있었다
“(p.46). </p>

#인간의 진화에 관해

그리고 종종 우리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진화의 양상으로 생각되지만 생물학적인 진화는 ‘획득 형질’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같은 시간에 서로 진화의 양상이 다른 집단들이 공존할 수도 있다.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사람속의 조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과 어떤 경우에서건 사다리는 진화의 길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다
“(p.77). “서로 연관이 없는 것이 분명한 사람과의 3계통(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로부스투스, 그리고 호모 하빌리스)이 공존했음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사다리는 어떻게 되는가? 더구나 그 셋 가운데 어느 하나도
지구상에서 생존해 있는 동안 이렇다 할 만한 진화 성향을 보여 주지 않았다
“(p.82).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나 국사 교과서에 나온 인류의 진화도식이라는 것들에 나오는 선형성은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 최소한 진화론적으로는 그렇다.

또 인간과 동물에 있어서의 관계들에 있어서도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우위를 말하게 될 때마다 등장하는 ‘이성’ 혹은 ‘언어’ 등등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동물들이 ‘고등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사실 어쩌면 사람들이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오히려 우리보다 똑똑한 어떤 점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2009/07/10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에세이] – 공감으로 ‘발견’한 천재 앵무새- 알렉스와 나, 이렌느 페퍼버그, 2009, 꾸리에 인간중심적 시선들에서 벗어날 단초를 굴드는 제공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특이성이 뭔지가 쟁점이 되는데 굴드는 포유류로서의 인간의 출산 전략등을 통해서 다시 조명할 수 있게 한다. 이를테면 영장류의 패턴상으로 인간의 아기는 출산의 시점보다 사실 임신기간이 7~8개월에서 1년 정도는 더 길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기간을 생략하고 대신 ‘세상 속’에서 키우는 전략 쪽으로 진화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학습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어둡고 아무런 도전적 요소도 없는 모태 내의 환경을 가급적 일찍 벗어나서 시각, 후각, 청각, 촉각적 자극이 훨씬 풍부한 자궁 바깥의 환경에서 양육되는 것이 훨신 더 유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p.103).

#왜 인간은 K전략을 선택했을까?

이제사 알게 된 것이지만, 처녀생식이 유성생식보다 훨씬 더 ‘유리한’ 전략이다. 환경이 열악할 때에 있어서 구태여 암수의 ‘교미(섹스)’ 없이 빠른 방식으로 많은 후손을 퍼뜨리는 것은 유전자의 ‘종족 번식’이라는 궁극의 목표에 있어서 최적적이다. 버섯 혹파리의 경우는 환경에 따라 번식 전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먹이가 풍부할 때에는 처녀 생식을 하는 어미들이 4~5일 이내에 모두 암컷인 새끼를 낳았다. 그러다가 먹이를 조금씩 줄였더니 모두가 수컷이거나 암수가 혼합된 새끼들이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암컷 애벌레들을 굶주리게 했더니 그들은 정상적인 파리로 성장했다(p.126)”. 하지만 많은 생물들은 유성생식을 하곤 한다. 그건 왜일까? 거기서 더 고려해야 할 것들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로버트 맥아더라는 생태학자와 에드워드 윌슨의 r전략(선택)과 K전략(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한다. “우리는 형태를 세밀하게 조정하는 대신에 번식을 극대화하려는 진화적 압력을 r선택이라 부른다. 그와 같이 적응한 생물은
r전략가이다. 반면에 비교적 안정된 환경 속에서 환경이 허용하는 최대의 개체군을 이루며 존재하는 생물 종이라면, 적응 능력
자체가 별 볼일 없는 자손을 많이 낳아 봤자 특별한 이익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정밀 조율된 소수의 자손을
낳아서 기르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그런 생물을 우리는 K전략가라고 부른다
“(p.128). 인간은 K전략을 선택했다. 인간에게 그것들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K전략이 유리한 환경에서 자란 인간들이 다른 생물들의 번식에 관한 인식들을 ‘열등’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위치 때문에 생긴 ‘지위의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다른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 바깥에서 다시 그림을 그려야 할 필요를 발견한다.

#다윈 이후, 굴드 이후
굴드는 2002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학교 2학년 때 굴드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었던 게 생각이 나고, 또 다른 기억으로는 Rethinking Marxism이라는 사이트를 통해 그에 대한 특집을 봤던 기억이 있다. 2010년에 읽은 <다윈 이후="">의 글들은 사실은 35년 전의 글들이고, 지금 생물학계 또는 생태학계에서 굴드의 입장들이 어떻게 평가받는지에 대해서는 별 정보가 없다. 최근의 관련된 논의들을 다시금 주제별로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굴드의 글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 때 묘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진화론자들이 엥겔스에 대한 재평가를 할 때의 순간들이 떠올라서 였다. 생물학과 생태학과 인류학이 맞닿는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더욱 궁금해졌다. 이를테면 살린스의 <석기시대 경제학Stone="" Age="" Economics=""> 등의 논의에서 나왔던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인류보다 석기시대의 그 ‘원시인’들이 더 영양에 있어서도 유리했다는 이야기등을 함으로써 진화가 ‘진보’랑은 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p>

현대자본주의의 ‘환상’을 깨뜨리는데 어떤 지점들을 제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어떤 대안들을 그림에 있어서 진화생물학은 어떤 기여들을 할 수 있을까. 생각들의 ‘뜨개질’이 필요하지 않을까. 굴드는 그것들을 엮어내는 방법을 조금 보여준 듯 하다. 최근의 논의들은 또 어떤 방식으로 이런 이야기들을 엮어내고 있을까?

(책 추천 받습니다!)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