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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잔혹한 권력관계- 사랑, 그리고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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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 ![]()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문학세계사 |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언제 읽게 될까? 나에겐 적절한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자꾸만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어 안개 속일 때 노통브의 소설들은 나로 하여금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주곤 했다. 냉수먹고 속차리게 한다면 너무나 싼티나는 표현일까? 심박수가 너무 빨라지거나, 혹은 머릿속이 너무나 정리가 되지 않을 때. 필요 이상의 멜랑꼴리한 감정에 휩싸일 때 노통브는 내게 그 뒷 일들을 말해주곤 했다. 사실 그녀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녀와 대결하고 싶다. 그녀가 만들어 놓은 ‘현실’이라는 것들이 또 하나의 우상임을 증명하고만 싶다. 이를테면 정이현의 소설을 읽을 때, 압구정 현대와 반포 주공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 어떤 감성에 대해 도전하고 싶은 마음. 그것과 조금은 비슷하고 또 조금은 다르다. 정이현에 대한 반감은 이성적인 것이라면, 노통브에 대한 반감은 정서적인 것이다. 어쩌면 감수성의 문제. 그녀는 내게 5살은 많은 어떤 누나의 연애 상담 같다. “너 말린 거야. 당장 때려쳐. 세상에 여자는 많아.”
<앙테크리스타>의 주인공은 16살. 우리 나이로는 17살 혹은 18살. 대학교 1학년. 한국에서만 그런 줄 알았으나 벨기에에서도 ‘소녀’와 ‘여인’의 중간 나이를 말하나 보다. 물론 한국에서 18살에 ‘소녀’와’ 여인’의 중간 나이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평균의 경로에서 이탈함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또 꼭 다 그런 건 아니다. <앙테크리스타>의 주인공은 꼭 다 그렇지는 않은 약간의 경로 이탈한 여성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만약 내가 사랑을 한 적이 없다면 그래도 마땅하다 하겠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내가 마음을 준 여자애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 마음을 원치 않았다. 사춘기에는 한 남자애한테 홀딱 빠졌었는데 그 애는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나마 그건 내게 분에 넘치는 사랑이었다. 다정한 말이나 어루만짐조차 나는 줄곧 거절당해왔으니까“(p.50). 사실은 여자라고만 말할 수도 없다. 주어의 나는 ‘남자애’로 해도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 같다. 내가 18살에 겪었던 문제이기도 하니까. 난 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늘 거절당했던 것, 그게 내 문제였다. 덕택에 공부 따위는 잠시 내려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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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크리스타. 그녀는 어느새 내게(블랑쉐-하얀white) 다가와 내 모든 것을 빼앗는다. “내 가슴엔 비수가 꽂혔다. 나는 비참한 현실을 깨달았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p.52). 엄마와 아빠도 내 모든 말을 그녀에 대한 질시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문제는 결국 내 고까운 시선에서 비롯된다는. <사랑의 파괴="">에서 보여지는 문제와 사실은 동일하다. 너무나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그녀, 거기에 대해 어떠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는 나. 이미 이건 권력관계의 문제가 된다. 순진하게 그녀의 매력을 따지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녀를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노통브는 늘 적대의 삼각형을 그린다. </p>
결국 소설 속의 블랑쉐가 깨닫는 것은 다른 방법의 저항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순진하게 그녀를 받아들이고 그녀의 지적을 내 것으로 만들어 소화하고 그녀가 바라는 내가 되는 것은 계속적으로 나를 노예로 만드는 길일 따름이다. 블랑쉐는 크리스타가 소개하는 파티에서의 남자애들과의 키스를 그 일탈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호시탐탐 크리스타의 몰락의 타이밍을 재게 된다. 순진하게 엎어지지 않으므로. 동맹군을 만들려 하지만 그 대상이었던 사빈은 크리스타의 자장 바깥으로 나서지 않는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뭘까. “나는 지배자니 피지배자니 하는 이야기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분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게
남자건 여자건 친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우정이라는 고귀한 이름이 쌍방의 동의가 없는 모호한 예속관계나
의도된 모욕, 항구적인 쿠데타, 역겨운 굴종, 심지어 희생양을 만드는 행태들에까지 결부되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자주
보았다“(p.165).
사실 모든 사람들은 이 긴장관계를 느끼면서 살고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고귀한 사랑의 이상이나 연애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면서도 말이다. 노통브는 그 껍질을 한 꺼풀 벗겨 날 것 그대로 드러내줄 뿐이다. 여기에 저항하고 싶고 여전히 나도 사랑의 이상을, 연애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날 것 그대로의 뭔가에 대한 감을 잃는 순간 다시금 그 이상과 아름다움은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아찔한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칼을 잘 벼리거나(그 날 것 그대로의 것을 잘 인지하거나) 아니면 그 바깥의 세계에서 살 거나. “불행이 가져다준 좋은 점도 있었다. 나의 방과 책 읽을 권리를 되찾은 것이다. 이 시기만큼 책을 열심히 읽은 적이 없었다.
과거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도 나는 탐욕스레 책을 읽었다. 책읽기를 도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책읽기란 가장 정신집중이 된 상태에서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그것이 언제나 흐리멍텅한 상태로 현실에 뒤섞여 있는 것보다 덜 두렵다“(p.167).
노통브의 세계의 내부에는 그러한 권력관계가 늘 내장되어있는 것 같고, 그 세계 바깥에는 애호가의 세계이면서 평혼하고 동시에 느슨하다. 노통브가 원하는 것이 세계의 내부인지 외부인지를 잘 모르겠다. 난 그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고 싶다. 그런데 그것은 얼마나 가능하며 또 어떻게 가능할까. 또 한 번의 사랑이 끝났다고 내게 선포하면서 노통브를 읽었다. 매번 노통브를 나는 그렇게 소비하곤 한다. 사실 이번에도 나에 대한 애도를 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마치 진통제를 맞듯이 난 노통브의 소설을 읽곤 한다. 언젠가 그 진통제를 통한 통증 완화로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어디에서 곪아터질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종종 필요하다. 어쨌거나 난 지금 힘을 얻었고 꾸역꾸역 밥을 먹을 수도 있게 되었다.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웃을 수조차 있게 되었다. 노통브가 내게 주는 치유는 오히려 ‘현실의 잔혹함’ 그 자체이다. 그녀의 소설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