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라캉, 이건 뭐지?

에크리8점
김석 지음/살림

라캉, 잘 모른다. 정신분석, 역시 잘 모른다. 당연히 프로이트와 라캉의 저작을 읽은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블로고 스피어에서 벌어지는 아이추판다노정태 그리고 이택광한윤형 또 많은 이들이 벌이는 논쟁에 개입해 본 적이 없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가 내 기본적인 입장이기도 하니까. ‘상식인의 포지션’으로 개입하기에 정신분석학의 언어는 너무나 일상의 것과 다르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곤 했다. 라캉에 대한 논의를 그나마 읽어봤던 것은 이진경의 <철학의 외부="">에 나왔던 논문을 봤던 것 정도이다. </p>

구조주의에 대한 몇 가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로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논의들을 빈약하게 지탱하고 있을 따름이다. 당연히 지젝도 잘 모르고, 지젝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은 그나마 읽어본 들뢰즈 덕택이다. 어쨌거나 다음 학기 이택광의 수업을 수강할 계획이고 그는 <문화연구입문> 시간에 읽어야 할 텍스트에 라캉과 지젝, 바디유와 랑시에르라는 하나의 계통을 통으로 집어 넣어놨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p>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현대정치철학자들의 계통을 따라보면 난 라캉-지젝의 관점과는 좀 다른 방식들로 바라보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계통은 니체-스피노자-맑스-그람시-네그리-들뢰즈의 길이다. 이건 연구공간 수유+너머
<노마디즘 세미나=""> 덕택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에서는 내가 니체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맑스-레닌주의를 취할 때의 답답함도 ‘중심'(혹은 일자)로 환원되고 뭔가 구속복을 입고 있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싫었다.
다양한 중심들, 그리고 뭔가로 환원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읽어내는 것이 내게는 좀 재미있고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분석을 할 때에는 중심에 대한 논의들을 할 수 있고, 이럴 때 알튀세를 읽거나 헤겔주의자들의 관점을
취하는 것은 늘 재미있는 일이었으나 내게 그건 별로 긴장을 주지 못해왔다. </p>

어쨌거나 라캉에 대한 김석의 책을 읽는다. 라캉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에 대해서만 대충 감을 잡고 있는 나에게 친절한 라캉에 대한 소개서는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가 살았던 릴Lille거리 5번가를 가봤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1960년대부터 한참 빠리의 지성을 수놓던 사르트르, 알튀세,
푸코, 들뢰즈, 데리다, 그리고 라캉의 시대를 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코제브의 헤겔 강의를 내가 만약 들었다면 또
나는 어떤 사유의 선을 키웠을까 하는 생각이 좀 있다.

라캉에게 있어서 언어를 통해 구조화되어있는 상징계와, 자아의 ‘거울단계’를 구성하는 상상계, 그리고 상징계를 뛰어넘는 실재계에 대한 논의들을 살피게 된다. 프랑스의 68세대 근처의 사람들은 늘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공략하려고 했고 첫번째의 승리가 아마 구조주의자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 라캉 역시 그러한 조류들을 조립하고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연금술’을 발휘한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라는 말장난 같은 말은 코기토의 죽음을 선포한다. 무너져버린 자아를 통해 구성되었던 코기토를 가지고 인식론 자체가 구성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철학적 주체는 죽었다. 주체가 상징계의 호명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체는 늘 소외되고 다시 분리된다. 신이 무너지고 이제 주체가 무너진다. “시니피앙은 또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 주체를 대리해서 표상하는데 우리가 통상 사유의 출발점에 놓는 주체가 사실은 시니피앙의 호명
효과에 불과하다는 게 라캉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주체에게는 당연히 자유도 없고 상징계에 대한 우월성도 없다
“(pp.117-118).하지만 이는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언어는 주체를 상징계에서 의미로 출현시키면서 그 이면 효과로 주체 분열을 발생시키는데, 그 결과가 첫 번째 과정인 소외이다.
그러나 주체는 소외에 매몰되지 않고 분열 속에서 결여로 남게 되는 잃어버린 대상을 분리함으로써 자신을 주체로 생산하게 되는데
이것이 분리의 의미이다. 주체는 분리라는 능동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욕망하는 존재로 확립한다
“(pp.110-111).

주체는 상상계의 ‘자아-거울단계’를 지나 부성은유(오이디푸스컴플렉스에서의 아버지의 남근)의 상징계적 호명에 응답하므로써 주체가 된다. “이 과정은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란 시니피앙에 동일시를 함으로써 주체가 상징계에 안착하는 순간이다.
(……) 세 번째 시기는 실재적 아버지가 등장하여 자신을 남근의 소유자로 내세운다. 이 모든 것은 상징계의 질서에 의해
부여된다
“(p.133). 라캉의 오이디푸스컴플렉스에 대한 해설은 프로이트의 것과 달리 ‘언어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소통을 시도하지만 그것은 근원적으로 ‘결핍’을 만들어낼 뿐이다. 욕구는 요구를 만들어내지만 언어를 통한 요구는 그 욕구를 정확하게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자란 결핍의 부분이 ‘욕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욕망’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욕망은 욕구와 요구의 불일치 혹은 차이처럼 나타난다. 이 차이는 구조적인 것으로 라캉은 이것을 욕구와 요구의
분열(Spaltung)이란 말로 지칭한다. 욕구와 요구의 분열은 사물의 살해 위에서 구축되는 상징계의 본성에서 비롯되며 주체는
이를 결여의 형태로 체험한다. 라캉은 이를 특정 대상의 결여가 아니라 존재 결여라고 말한다. (……) 대타자가 결여된
존재라는 것이 라캉의 욕망 이론에서 중요한데 그것이 욕망이 상징계에 대한 복종에만 머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욕망은 상징계
속에서 언어의 한계를 죽음 충동으로 체험하면서 그것을 뛰어넘고자 하는 주이상스로 발전해간다
“(pp.186-188). 대타자, 부성은유의 상징계를 지배하는 시니피앙도 사실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상징계의 바깥이 돌출하는 순간, 주이상스든 숭고의 순간이든. 그것들이 가능할 때 우리는 현시되는 욕망을 본다. 그리고 그 순간에 돌출되는 실재계의 모습을 잠시 발견한다. “불가능한 욕망을 주이상스라고 하며, 이것이 지향하는 대상이 바로 절대적 숭고함인 실재이다“(p.242). “라캉에 의하면 주이상스는 무엇보다도 쾌락원리 너머로 가보려는 전복적인 충동이다. 쾌락원리는 가급적 적게
향유하도록 한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지 않으면 쾌락은 은 불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이상스는 쾌락원리를 위반하여 그
너머로 가보려 하기에 본성상 파괴적이다. 쾌락원리를 넘을 때 주체를 기다리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이다
(p.244).

그런데 그의 ‘거시기’ 혹은 ‘남근’에 대한 구도는 영 찜찜하고 불편하다. 여성의 주이상스에 대한 그의 ‘발뺌’ 혹은 달리 읽기도 궁색해 보이기도 하다. 마초적 시선이 느껴진다. “여성은 거세에 대한 예외적 일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 자리에 도달하는 것을 꿈꾸지도 않는데 이러한 입장이 역설적으로 남근을 넘어서는 주이상스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p.218). “여성의 성적 위치는 개별성의 논리에 따라 남성적 위치가 경험하지 못하는 다른 향유에 근접하는 소수적 특권이 부여된다고 말할 수 있다“(p.219). 페미니즘에서 지적하는 ‘배려’와 ‘폭력’의 양가적 시선이 라캉에게서도 느껴진다면 이건 곡해일런지? 크리스테바나 버틀러는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까 궁금했다. 1960~70년대 한참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이 있을 때 라캉은 어떤 포지션이었을까도 좀 궁금하다.

책의 저자인 김석. 만약 내가 학부 2학년 쯤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왔다면 그의 철학과 수업을 수강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의 라캉의 주저 <에크리>에 대한 이야기는 꼼꼼하게 논점들을 잘 짚으면서 해설을 하고 있다. 다만 좀 지루하게 중언부언하는 감이 있는데, 이는 좋게 보면 친절하게 부연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p>

지젝의 라캉에 대한 해설들이 좀 궁금하긴 한데, 라캉을 더 읽어봐야 하나? 몇 가지의 괜찮은 해설서를 로쟈의 블로그를 좀 추천받았고 기회가 되면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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