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의 재발견, 좌파 정치의 문을 열기 위하여

진보의 재탄생10점
노회찬 외 지음/꾸리에

2010/01/12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선진 노동자의 이름으로 – 1991년의 사회주의자들
2010/01/01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에세이] – 심상정이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의 1% – 심상정, 당당한 아름다움
2009/11/11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진짜 좌빨들의 시대는 안 왔거든? – 이광일, 좌파는 어떻게 좌파가 됐나, 메이데이, 2008
2009/08/24 – [일기장/하루 하루의 기록] – 데뷰 : 우석훈과의 공저 작업 – 인민노련

내가 사회당원이라는 정체성을 버릴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노회찬 때문이다. 2004년 노회찬이 TV에 나와 고기판을 갈듯 정치판을 갈아야 한다는 ‘판갈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난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에 정당명부 비례대표 한 표를 던질 생각을 먹었다. 지역구(중랑을)에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이 없었으므로 열린우리당의 후보를 찍긴 했지만. 그의 언변도 언변이었지만, 그의 달변은 ‘야부리’로 때우거나 입장을 적당히 뭉게는 것이 아니었다. 진중권이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라면 노회찬은 좌파 ‘정체성’과 ‘현실’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절묘하게 혼합시켜 들려주었다. 그는 타협하지 않되 재미있었다. 그 두가지를 갖춘사람은 운동권 바닥과 정치인 전체를 통틀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노무현의 아우라와는 좀 다른 것이었다.

진보신당이 분당할 때 난 군대에 있었고 아무 짓도 못하고 있었다. 2009년 7월 1일부로 당원으로 가입했다. 국방부의 구속복에서 벗겨나는 시점이었다. 노회찬과 심상정, 그리고 조승수를 떠올리며 당원으로 가입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지지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보신당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에 발을 딛기는 싫어졌다. 노회찬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심상정과 조승수에게서 느끼는 매력과는 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한윤형이 책 속의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하지만 나도 중3때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을 읽었었다. 나 역시 환빠이기도 했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가 중국 중원에서 벌어졌을 거라는 정용석류의 ‘재야사학’에 관심이 있었고, 한국사가 가장 재미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노회찬의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은 너무 재미있었다.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통사지향과는 다른 내러티브가 있는 책이었다. </p>

<진보의 재탄생="">. 제목을 보고 좀 적잖이 실망한다. 왜 이리 정직하게 제목을 썼다는 말인가. 좀 더 ‘섹시하게’ 뽑으면 안 된다는 것인가. 꾸리에 출판사 강경미 대표한테 e-mail을 하고만 싶었다. 다행히 사진은 너무 좋다. 사진가 이상엽에 대한 신뢰는 2004년 부터 있었지만 이번 사진도 역시 걸작이다. 그리고 제목에 적절한 노회찬의 발문이 바로 그 생각들을 녹였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노회찬은 말을 옮겨 적으면 글이 되고, 글을 소리내어 읽으면 명연설이 될 것만 같다. 그의 글과 말 모두
너무나 매력적이다.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 겨울이었다. 백색의 풍경 속으로 묻혀버린 2009년의 시간 속엔 참 아픈 기억들이 많이 남겨져 있다.
영하(零下)의 대기를 통과하는 동안 나는 사람들의 말수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제 꿈을
드러내기를 주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p.4). </p>

노회찬이 ‘진보’를 말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김어준, 김정진, 변영주, 진중권, 한윤형, 홍기빈, 홍세화가 노회찬한테 ‘진보’를 묻는다. 각자의 스타일대로 노회찬에게 창끝을 겨누고 마치 일기토를 하듯이 찌르려 애를 쓴다. 노회찬은 쉽게 당하지 않는다. 마치 삼국지의 관우를 보는 느낌이다. 오나라의 노숙이 형주의 관우를 초청했을 때 간계를 짜고 있었으나 차분하게 상황에서 가장 최적의 대응을 했던 시절의 그 관우. 유유히 장강을 건너면서 인질로 잡았던 노숙을 풀어주는 관우의 그 모습이다. 아이폰과 블랙베리를 함께 들고다니고 ‘트윗질’에 빠진 얼리어답터이면서도 여전히 사회주의적 지향을 놓지 않는 좌파의 노회찬은 현실에서 차분히 공부하면서 그러면서도 놓치면 안 될 것들을 챙기고 있었다. 호기어리게 덤비는 사람이 아니다. 무선인터넷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읽어내는 것이나, 혹은 다문화사회에 대한 관점들이 그러하다.

섞일 수밖에 없는 걸 인정해야 되고 다만 섞이는 것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가기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이냐를 고민해야지요. 일차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차별 문제입니다. 대개 많은 갈등은 차별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차별이 제도적이거나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까지도 극복해야만 공존이 가능하다는 거죠. 우리
한류보고 뿌듯하게 생각한다면 중류나 일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거냐는 거예요. 하토야마 수상 부인이 김치 좋아하고 이런 거는
대서특필되고 있잖아요. 만일 우리 걸 받아들이는 건 좋아하고 남의 걸 안 받아들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열등감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요
“(p.274).

또한 노회찬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이 든다. 삶의 결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이라기보다는 선택이니까.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제게는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사석에서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 하는 얘기가 있는데, 인생이 한 번밖에 없거든. 인생이 두 번 세 번 있으면
요렇게도 한 번 사랑보고 저렇게도 한 번 살아볼 텐데 한 번밖에 없기 때문에 잘 살아야 된다 이거야. 이 시간은 가면 다시 안
오고. 삶이나 인생에 대해 애착이 큰데, 그래서 굉장히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이죠. 자기가 볼 때 누구 눈치 보는 일 없이 마음에
흡족한, 자신 있는, 손해 보더라도 판단을 해야 된다는 거죠
“(p.152).

다만 그는 좀 ‘썰렁’한게 탈인데. 다행인 건 그의 진지함과 ‘감성’들이 함께 어우러질 여지들이 있다는 것이다. ‘첼로를 켜는 노회찬‘. 홍세화의 칼럼처럼 말이다. 미테랑처럼 온 국민이 악기 하나 씩은 할 수 있는 나라. 노회찬과 함께면 가능하지 않을까. 구체적 일상과 정치를 결합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의 과정들이 ‘개그 코드’에 익숙해져버린 어떤 이들에게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노회찬은 마지막 장에 쓰인 우석훈의 글처럼 ‘텐, 텐, 텐'(진보신당 당원 10만, 노회찬 개인 지지율 10%, 진보신당 지지율 10%)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여전히 노회찬은 구좌파적 모티브를 가지고 있고 다른 이슈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하지만 그와는 대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든다. 무엇이든 잘 ‘들어주는 사람’일 것만 같아서이다.

물론 나는 선거를 위해 이 책에 대한 ‘홍보’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 책에 대한 순전한 단상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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