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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랑시에르. 내가 무지한 걸까, 아니면 번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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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의 분할 – ![]() 자크 랑시에르 지음, 오윤성 옮김/비(도서출판b) |
예전 바디우와 랑시에르를 비교하는 글을 어디에선가 읽은 적이 있었고 확 꽂혔었다. 난 기본적으로 보편적으로 뭔가를 묶어내려는 ‘기획’들에 대해서 굉장히 ‘적대적’인데. ‘공통감각’, ‘윤리’ 등의 단어가 나오기 시작하면 손발이 오그라들기 시작한다. 롤스, 바디우. 그냥 도망치기로 했다. (물론 읽어야 할 때 피할 수는 없을 거다. 이번 학기 이택광의 수업에서 바디우의 <조건들>을 읽어야 한다.) 어쨌거나 들뢰즈에 확 몰입했던 시절에서 빠져나와 요즘 한참 트렌디한 ‘정치철학자’ 중에서 랑시에르에 주목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 학과에서 <문화연구입문> 수업 준비로 몇 가지의 텍스트를 선정할 때 수업 교재 중
책은 14,000원. 비싸다. 전체 페이지 160페이지. 랑시에르의 원문은 기껏해야 80페이지도 안 되는데, 뒤에 대담들과 지젝의 발문. 그리고 저자의 랑시에르 소개, 옮긴이의 말, 미주 등이 들어갔더니 160페이지가 되었다.
160페이지짜리 책을 읽으면서 졸고, 읽고 나서 남는 것이 없다. 도대체. 나중에 나온 지젝의 발문은 좀 이것 저것 랑시에르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하지만 <감성의 분할="">이라는 책을 읽고 랑시에르의 어떤 면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가 없겠다. 내가 ‘미학’에 무식해서일까. 아니면… 오윤성의 번역에 문제가 있을까.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 나온 ‘영광을 …. 하나님께’라는 말 때문에 갑자기 신뢰가 깎였다면 내 신앙의 문제겠지? ; 어쨌거나 정말 안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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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도중 로쟈의 포스팅을
양창렬이 번역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 ‘감성의 분할’이 아니라 ‘감각의 나눔’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는 번역에 대한 비판도 찾아냈다. 그리고 양창렬이 번역한 책을 읽다보니 랑시에르의 ‘날 선 모습’이 떠오른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의 번역은 명쾌하고 술술 넘어간다.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사회과학도라 그럴까. 다 읽고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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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읽고 영어판을 사서 보기로 했다. 근데 알라딘에 리뷰를 쓴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했다는 이야긴데, 과연 이게 읽히는 책일까??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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