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평등을 말하기 위한 정치철학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0점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길

 2010/02/25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처음 읽는 랑시에르. 내가 무지한 걸까, 아니면 번역이?

문화연구의 딜레마

문화연구를 공부하다보면 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를테면 구조의 제약이다. 푸코의 ‘통치성’이나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만나게 될 때가 그렇다. 호명하면 불려오는 자본주의적 주체들은 “yes, chef!”하고 뛰어오곤 하며, 동시에 그걸 자기의 ‘주체적인 결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국가의 통치기구들은 그것들을 훈육하고 각각의 주체들은 그것에 별 불만 없이, 아니 훨씬 더 적극적으로 행하곤 한다. 그 연계고리가 끊어진다면 뭔가 ‘저항’과 ‘전복’이 가능하다는 것. 모두들 인정하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사유할까에 대한 고민은 정답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정답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부르디외의 사회학들을 읽기 시작하면 이제 아예 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난 그러한 구조적 사유, 권력의 사유에 대해 피해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문화연구를 공부하고 싶어진 동기는 푸코 때문도 알튀세르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굉장히 많은 영감을 받았던 책들은 E. P. Thompson이나 에릭 홉스봄, 그리고 로버트 단턴(2009/06/25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인문학] – 내밀하고 구체적인 사람들의 역사 – 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 문학과 지성사, 1996) 등이었다. 우리가 흔히 ‘억눌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본주의적 메커니즘에 ‘적극적’으로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갔던 것은 알량한 ‘중간계급의 판타지’에 포섭된 중간층 정도였던 것 같다. 손낙구의 최근 저작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밝혀지듯 아예 제도권 밖, 법망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버려져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투표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여유도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재생산하는 학교, 군대와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어쩌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성급하게 “서민들이 왜 좌파 정당을 찍지 않냐?”라고 푸념하는 것은 일부 좌파들의 명백한 오류이다. 그들의 삶의 맥락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

랑시에르를 읽는다. 이택광의 표현에 의하면 최근 정치철학의 사천왕(랑시에르, 발리바르, 바디우, 지젝)이란다. <감성의 분할="">(정확하게 지금 우리의 말로 번역하자면 ‘감각적인 것의 나눔’정도가 되겠다)을 읽고 짜증을 내다가 양창렬의 책을 잡자 이 책은 훨씬 더 명쾌했다. 서문에 나오는 비유가 재미있다. “정치에 대한 철학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명령문으로 잘 요약될 수 있다. 정치를 그것에 내재하는 위험에서 빼내기 위해서는
정치를 마른 곳 위로 끌어내고, 그것을 육지 위에 안착시켜야 한다
“(p.6). “하지만 우리는 바다가 이 폭력들에 대해 복수할 것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기획이 내포하는
역설에 따르면, 정치를 앎과 용기라는 확고한 요소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재정초의 섬들에 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또다시 바다를
횡단하고, 목자들이 재정초한 도시국가의 계획들을 변덕스러운 물결과 선원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p.8).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에 나왔던 ‘밤’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오른다. 명료하게 만들어내는 것들은 이들의 적이다. ‘정치적인 것’은 명료한 것과 다른 명료한 것 사이의 ‘변덕스러운’ 곳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지보다는 바다가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생각에 걸맞는다. </p>

소련이 무너지고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이제 정치는 “이제 모든 사회 해방의 약속, 모든 종말론적 기다림의 지평에서 자유로워졌다는 것 말이다. 정치는 공동체의 이해관계들에 대해
숙고하는 경영의 본성에 도달했다. 살인적인 평등은 경제적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고,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평형에 대한 계산에
자리를 내주었다. 마침내 자신의 혁명적 기원에서 빠져나온 민주주의는 공동체와 공동체의 서로 다른 부분들이 갖는 이해관계들의
평형을 맞추는 것에 대한 다수의 합의(consentement)로 귀결되었다
“(p.13).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유럽의 사태는 이주민들에 대한 공포와 그들의 봉기였다. ‘합의’의 환상은 깨어져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이주민에 대한 공포와 테러, 봉기는 모두 ‘정치’가 정지한 곳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랑시에르는 ‘정치를 재발명’하자고 말한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좌파의 정치의 탐색, 저항의 가능성을 말한다. 그는 그 저항의 가능성을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불화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의 목표를 ‘평등’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평등’이라는 말이 얼마나 후졌는지를 따질 수도 있겠다. 또한 소비에트를 연상하고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떠올리면서 평등이라는 것의 기획을 부인할 수 있겠다. 동시에 서구 사회민주주의에서의 ‘복지국가’와 ‘평등’을 동일하게 연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랑시에르에게 평등은 산술적인 것도, 기하학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본원적인 속성을 말한다. 이를테면 ‘평등’에 대한 요청은 어떤 목표가 아니라, 보편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 “정치적으로 유일한 보편이란 평등뿐이다. 그렇지만 평등은 인간성이나 이성의 본질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의 가치가 아니다. 평등이란
그것이 실행되는 한에서만 존재하며, 보편성의 효과를 낸다. 평등은 우리가 내세우는 가치가 아니라, 각각의 사례 속에서 전제되고
입증되며,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보편인 것이다. 보편성이란 특수한 상황들에 반대되는 공동체의 원리가 아니다. 보편성은 증명들의
작인(作因)이다
“(p.138). 이러한 규정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산술적인 것도, 기하학적인 것도 아닌 “셈-바깥을 가리키는 이름, 내쫓긴 자(outcast)의 이름인 것이다“(p.140). </p>

공동체에 대해

또한 랑시에르는 기존의 ‘공동체’. 맑스가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말했을 때의 구상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를 말한다. 이를테면 그리스 영웅들의 공동체, 사도들의 공동체의 방식들을 비판한다. 그 안의 위계가 없어야 하며, 서로의 관료제적 업무 분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는 ‘공통성’을 중심으로 매개되어선 안된다. “평등은 같은 척도로 잴 수 없는 것을 측정하는 경험 속에서, 평등 전제를 기입하는 사건의 환기 속에서, 그
사건의 새로운 연출 속에서만 사회체 안에 기입된다. 이 연출은 어떤 정초 위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일어
났음
(il y a eu)을 가리키는 어떤 일어났음에 기댄다”(pp.186-187). 평등을 같은 척도로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단결’을 말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짓이다. “좌파는 분열로 망했다”라는 말에 랑시에르를 위시한 사람들은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서로 다른 입장의 누군가가 ‘중심부’의 권력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들을 가지고 계속 ‘계쟁’ 혹은 ‘불화’하면서 공존하고 또 서로 잘 분리할 수 있는 관계. 이것은 ‘분열’과 다르다.

딜레마 풀기

랑시에르를 읽으면서 21세기에 맑스주의자, 좌파의 기획이라는 것들이 어떻게 수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사실 랑시에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것들은 없다. 뭔가를 화끈하게 깨부수고 새롭게 세우는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지금 있는 조건에서 어떤 가능성들을 탐색할까의 문제에 있어서 다시금 ‘정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랑시에르는 그 틈새 한 군데를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읽어낸 프랑스의 1833년의 노동자 문서고의 이야기는 헌법적 질서의 ‘재전유’를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 노동자들이 교란하고 다른 방식으로 저항했는지의 가능성을 말하는데, 이는 마치 E. P. Thompson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읽는 기분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중은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어떤 ‘결핍’을 읽어내고 그들을 ‘가르치려 드려는’ 것들이 문제다. <무지한 스승="">에 나오는 자코토의 이야기를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파올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가 연상이 된다(2009/12/07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억눌린 자들과 대화하기 – 파올로 프레이리, 페다고지
). </p>

민중의 말은 공식의 언어(logos) 바깥에 있다. 말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들을 계획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를 듣게 하는 일. 즉 지배계급 혹은 통치의 중심에 있는 이들에게 그것들이 그들의 언어와 대등하게 배치되는 것만으로도 민중의 성공이라는 랑시에르의 주장들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양창렬은 이러한 틀을 가지고 전태일을 분석하기도 한다.

또 다른 한 편에서, 딜레마가 풀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정치적인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다는 점이다. 좌파들의 우울증을, 문화연구의 우울증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정치는 그것의 종언을 향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종언’은 정치에 가장자리를 두르기를[정치를
제한하기를] 멈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p.34). 이제 문제는 지금까지 빽빽하게 배치되어있는 것같은 자본주의의 골조물 사이에 있는 저항의 가능성이 있는 ‘가장자리’들을 보여주는 일들이다. 여기에서 문화연구의 가능성의 지점들이 나온다. 어떻게 그들의 언어를 읽어내서 기성담론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해석할 것인가.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랑시에르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정치학에서 느꼈던 갈증들과, 문화연구에서 느꼈던 갈증들 모두 어느 정도 해소되는 순간이다. 평등을 위한 정치철학이라는 지점 하나를 말해볼 수 있겠다. 물론 내일이 되면 다시 갈증을 느낄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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