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여성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과 여성

프리드리히 엥겔스(이하 엥겔스)는 루이스 모건의 인류학적 연구를 통하여 가족과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을 보여준다. 먼저 그는 분석을 위하여 문화의 단계를 “자연 산물을 획득하는 시기”인 야만(Wildheit), “목축과 경작을 도입하는 시기이며 인간의 활동에 의한 자연물 공급의 증대 방법을 습득하는 시기”인 미개(Babarei), “자연물에 대한 가일층의 가공술을 습득하는 시기이자 본래적 의미에서의 공업 및 기술의 시기”인 문명(Zivilisation)로 구분하고 그 단계와 조응하는 가족의 형태를 탐색한다.

#원시 공산제와 씨족 사회, 그리고 가족 형태

엥겔스는 가족에 대한 이해에서 당대의 ‘일부일처제’와 부권에 기반을 둔 유추를 거부하고, 모권제 사회가 선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민속지 연구들은 가족과 원시 사회에 대한 편견을 지적한다. 그것은 가족과 군혼이 서로 대립된다는 것이다. “가족이 긴밀히 단합된 곳에서 군은 다만 드문 예외로서만 형성된다. 이와 반대로 자유로운 성교나 일부다처제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군이 거의 저절로 형성된다.”(엥겔스:1987, p.38)(이하 쪽 번호만 표시). 엥겔스에 의하면 초창기의 인류의 가족형태는 군혼이었다.

현재의 눈으로 과거의 가족 형태에 대해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준거로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것은 현재나 혹은 먼 과거의 어느 시기에 있었던 그런 금제(Verbotsschranken)가 당시에는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질투의 울타리는 이미 무너졌다. 그런데 질투의 감정이 비교적 늦게 발전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확실하다. 근친상간의 관념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p.40).

이러한 가족형태는 하와이의 푸날루아 가족의 형태로 진행한다. 군혼에서 이루어진 진보가 부모 자녀간의 성교의 금지였다면, 푸날루아 가족에서는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를 금지한다. 푸날루아 가족의 형태에서는 “최초에는 아내 편의 친형제, 후에는 또 촌수가 먼 형제가 배제되었으며, 그리하여 다른 편에서는 또 남편의 자매가 배제되었다”(p.44). 이러한 경향들은 점차 대우혼의 형태로 발전한다. 대우혼에서는 “남자는 많은 아내들 중에서 본 아내를 가지고 있었고 또 여자로서도 그가 여러 남편들 중의 본남편이었다. (……) 그러나 관습으로 된 이러한 대우관계는 씨족이 발전할수록, 또 이제는 서로 결혼할 수 없게 된 ‘형제’ 집단들과 ‘자매’ 집단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더욱 더 공고화될 수밖에 없었다”(p.52). 점차 혼인이 가능한, 성교가 가능한 범주는 줄어들게 된다. “이제는 여자가 적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다녀야만 했다. 그러므로 대우혼이 발생한 시기부터 여자의 약탈과 매매가 시작된다”(p.53).

하지만 이 시점까지 여성들의 권리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가부장제 사회와는 달랐다. “공산주의적 세대는 (……) 여성 지배의 현실적 기초이다. (……)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여성들이 훨씬 더 많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종족들은 우리 유럽인보다 여성들에게 훨씬 더 참된 존경심을 표한다”(p.55). 사유재산이 없었고, 노동이 가내의 부불노동과 임금노동으로 분할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문제에 있어서도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들에 온전히 종속되어있지 않았다. “그들은 (……) 지난날의 공유제를 허용하여 자기 아내들에게 젊은 사람들과 향락하는 것을 허락해야만 한다”(p.56).

# 사유재산의 도입, 씨족의 소멸, 가부장제의 시작

엥겔스는 여성의 억압이 시작되는 시점을 씨족 사회의 소멸을 연동한다. 목축업의 발달과 도구의 활용, 그를 통한 재부의 증가는 점차 다른 양상의 생산방식들을 만들어 내고 그에 걸맞는 생산관계-재생산관계의 변혁을 만들어 낸다. “가족은 가축처럼 그렇게 빨리 늘지는 못했다. 가축을 감시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 더 많이 요구되었다. 포로가 된 적들이 이 목적에 이용되었고, 더구나 그들은 가축과 마찬가지로 번식될 수 있었다”(p.61). 노예가 탄생하기 시작한다. 후에 이어지는 3장부터의 장들은 이러한 씨족 사회에서 국가로 진행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사유재산의 발달은 점점 더 큰 재산의 소유와 그에 대한 법적 보장의 과정, 그리고 다른 방식에서 군사적 조직의 확대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국가를 추동하게 한다. 시민군의 시대에서 ‘공권력’이 작동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부권사회-가부장제가 시작되자, 다시 말해 사유재산과 노예가 탄생하자 가족 내의 분업이 시작된다. 식료품의 획득과 노동도구의 획득을 남편이 담당하기 시작한다. 물론 소유권도 남편에게 있었다. 치명적으로는 상속이 남편의 권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노예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하였다”(p.63). 여기에서 일부일처제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엥겔스는 최초의 계급적 대립을 ‘남녀간 적대의 발전’이라 말하며, 최초의 계급적 압박을 ‘남성에 의한 여성의 압제’라 말한다(p.73). “현대의 개별 가족은 아내의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내 노예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리고 현대 사회는 순전한 개별 가족이라는 그런 분자로만 구성된 집단이다. 오늘날 남편은 대다수의 경우에, 적어도 부르조아 계급에 있어서는 돈을 벌어들여야 하며 가족의 부양자이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에게 지배적 지위를 부여한다”(p.82).

섹슈얼리티의 통제도 이루어졌다. 남성들은 군혼제 시절의 금지 없는 섹슈얼리티의 전유를 만끽했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엄격하게 통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인은 타산적인 것이 되었다. 사회적 필요에 의해 여성은 가내 부불노동의 영역에 배치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결코 개인적 성애의 소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애와는 절대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혼인은 종전 그대로 어디까지나 타산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 · 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형태였다”(p.72).

# 자본주의 너머, 가부장제 너머?

현재까지 쟁점이 되는 ‘가족임금제’에 대한 이야기와 ‘부불노동’ 그리고 ‘공사이분법’의 이데올로기를 엥겔스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엥겔스는 여성들의 ‘돌봄 노동’ 혹은 ‘재생산 노동’을 사회화시키는 것에서 가부장제의 해체가 가능하다고 본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이에 기인하는 소유관계’의 지양으로부터 여성들의 해방이 가능하고, ‘완전한 자유로운 결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성해방의 첫째 조건은 여성 전체가 사회적 노동에 복귀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한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다”(p.82).

엥겔스의 관점은 인류학에서의 진화론자들의 입장과 맞물려 있다. 애초 맑스와 엥겔스가 함께 저술한 『공산주의당 선언』에서의 역사유물론의 관점은 인류학에서의 진화론자들의 이론과 잘 어우러진다(제리 무어, 『인류학의 거장들』, 김우영 옮김, 한길사, p.54). 엥겔스는 아메리카 신대륙과 구대륙의 발전의 단계들의 상이성을 지적하지만 대체로는 단선진화, 인류의 경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엥겔스 본인이 서술하듯, 그 경로들은 나라에 따라 굉장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게르만적 전통과 그리스적 전통은 상이했고, 각각의 여성의 지위와 가족의 형태,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전유 방식은 차이가 있다. 이것들을 한 경로 상에서의 ‘속도’의 차이로 환원할 수 있을까? 또한 15세기의 유럽과 중국의 대비, 그리고 12세기 정도의 라틴아메리카의 문명들과 중세 봉건제하의 유럽의 문명들을 그들의 준거로 ‘문명’과 ‘미개’, ‘야만’의 도식으로 평가한다면 과연 어떠할까? 또한 지금처럼 중앙집권화되어있는 ‘민족국가’, 더 나아가 네트워크로 접속되어있는 ‘전지구화’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지역들 각각은 환원할 수 없는 차이들을 보여주고 있는 데, 중앙의 권력이라는 것들이 지금보다도 훨씬 미약하게 작동했던 세계에 대한 분석들을 할 때에 있어 하나의 도식을 가지고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체계를 한 선상에 배치할 수 있을까? 씨족이 해체되고 다시 노예제가 되었다가 봉건제라는 과정을 거쳤던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돌입되었을 때의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심지어 남성 노동자들의 저항들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엥겔스의 도식은 ‘과학’이라 불릴 수 있을까? 단순히 ‘씨족적 전통’, 즉 적체되고 동결된 과거의 전통이 그나마 현재의 가부장제를 완화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다시 돌아와 여성의 노동을 사유함에 있어서,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유물사관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 진화론과의 관계정립의 문제를 제기한다. 완전히 ‘국가’가 해체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의 ‘지양’을 목표로,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꿈꿨던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여성들의 노동은 어땠을까? 물론 이러한 문제를 엥겔스에게만 제기할 것은 아니다. 근대적 사회과학과 역사학이 보여주었던 ‘인식론’의 문제들과 ‘주체’의 문제들이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같은 전제로 시작하여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에서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