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급진적 해석과 대안적인 공동체

급진적 자유주의자들8점
김진호 지음/동연(와이미디어)

2009/01/23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신학-예수] – 다시 불어야 할 영성의 향기, 한국 개신교의 ‘오래된 미래’ – 조현, <울림></a>
2009/04/20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신학-예수] – 사회주의자와 함께 읽은 <마르코 복음=""> – 김규항, <예수전>, 돌베개, 2009</a>
2008/01/21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신학-예수] – 생동하는 대안적 신학을 위하여 – (김진호,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a> </p>

김진호와 맑스 꼬뮤날레

김진호하면 2003년 있었던 ‘맑스 꼬뮤날레’가 떠오른다. 그 때 최형묵, 김진호 등등의 ‘제3세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학자들이 ‘들뢰즈와 신학’에 대한 발제와 토론을 했다. 다 마쳐갈 때쯤 누군가 말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우리는 ‘목사’라는 직함을 유지하고 있는거죠?” 청중들이 빵 타졌다. 그리고 ‘제3세대그리스도교연구소’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목하고 홈페이지도 들낙날락하게 되었다. 구태여 내가 예수쟁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기로 했다. 맑스주의자인 것과 예수쟁이라는 게 어떤 의미에서 만날 수 있고 헤어지는 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김진호 목사의 <반신학의 미소="">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날선 그의 논리들이 생각이 난다. 예언자들이 민중을 배반하는 지도자에 대한 경고를 할 때의 그 사자후가 떠오른다. 동시에 그걸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타이틀에 껴맞춰서 불덩어리에 떨어질 거라고 말하는 한국 개신교 목사들의 지랄도 떠오른다. 어쨌거나. 그 책은 굉장히 날이 살아있었다. </p>

연 초에 백면서생님과 만나 차 한잔 하다가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한 번 읽어봄이 어떠냐 했다.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은 좀 가벼워진 느낌이다. 메시지가 약해졌다기보다는 침착하면서 좀 밝은 느낌이랄까? 여기엔 예전 80년대 민중신학에서 느껴졌던 비장함과 우울함이 좀 없다. 내용이 우울해도 스타일은 훨씬 가벼운 느낌이다. 카페에서 책에 나온 냇 킹 콜의 재즈를 봄비오는 날 듣는 느낌이다. </p>

김진호의 요한복음 읽기 : 자발적 소수자-되기

김진호는 요한복음을 다시 읽어낸다. 왜 요한복음일까? 그에 앞서 도올 김용옥의 <요한복음 강해="">가 한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김용옥은 로고스에 어느 정도 방점을 찍었던 것 같다. 이성의 질서. 그 질서로 돌아온 예수. RSV로 읽었던 김용옥의 사자후가 기억이 난다. (물론 김용옥은 어떤 주제를 말해도 뿜어내긴 한다.) 김용옥의 ‘구약 폐지론’도 생각이 난다. </p>

다시 왜 요한복음일까? 김진호는 지배자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현대 신학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공동체에서 교조화되고 조직화되며 거대화되는 기독교의 역사와 다른 경향을 발견한다. “한데 「요한복음」을 낳은 이들은 이러한 승리자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관념화 · 교권화 · 교리화되는
신학적 해석체계에 도전하는 영을 발견했다
“(p.9). ‘관념화 ˙ 교권화 ˙ 교리화’ 바깥에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 ‘그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제 로고스는 싸륵스를 통하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다
“(p.31). 싸륵스는 ‘살덩어리’를 말한다. 단순히 ‘육신’이 아니다.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게 아니다. 살덩어리가 된다. 이를테면 예수는 단순히 어떤 특별한 인간으로 온 것이 아니고, 똑같이 살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유한한 인간으로 온 것이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건 유한성의 제약 아래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그 사람 예수를
통해 영원한 것, 진리를 비로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육화된 신, 즉 유한성 속에 있는 진리다. 하여 유한한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고 있는 세계의 진리의 허위성을 폭로한다
“(p.218).

바로 허지웅에 대해 지적했던 문제의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2010/03/03 – [생각하기/요즘 일어난 일들] – 유일신은 진보와 간지좌파의 편도, 보수와 MB의 편도 아니다.) 예수가 절대자인 게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유한한 세계에 왔을 때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진리의 맥락에서 예수는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즉 싸륵스(살 덩어리)이기 때문에 유한했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현실계에서 예수는 인간이었다.

요한의 공동체는 바로 예수를 그렇게 읽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강화를 외치던 바울의 에클레시아에 대해서도 저항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김진호는 ‘자발적 소수자‘로 읽어내고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라고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요한의 공동체는 “‘영’을 자유로운 힘으로 묘사한다. 바울의 신학을 교회화하면서 주류 그리스도교가 교회를 ‘예수의 몸(소마)’이라고 주장하고,
교회의 직분을 체계화하려는 운동에 대해, 요한의 ‘영’은 저항한다
“(p.36). “이렇게 주류
사도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동기의식에도 불구하고, 요한계 공동체는 유대교를 모방하여 독자적 발전을 기획하는 주류 교회들의 예전화,
제도화 추세를 경계하고 있다. 요컨대 당시 주류 그리스도교 운동은 로마제국적 영웅주의나 유대 메시아주의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p.49).

김진호의 눈으로 읽어내는 요한복음과 요한의 공동체는 현대신학에서의 최 정점에 있는 철학적 논변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유롭고 싶었던 ‘영’의 공동체’와 ‘자발적 소수자’들의 ‘살덩어리’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신이 살덩어리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신에 대한 도그마들을 한 큐에 날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그마를 팔아먹은 ‘교권 주의자들’ 즉 ‘지배 계급’의 위선에 대한 폭로가 된다. 예수쟁이들과 권력이 아무런 상관없다는 이야기, 그리고 거기에 신을 얹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진호의 요한 공동체는 ‘전복’의 공동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로마인들에게 배척당하고, 유대교 회당에서 쫓겨나고, 주류 기독교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그 안에서의 갈등과 차이를 봉합하지 못하고 해소되고 만다. “만약 이러한 공동체 내부의 관점의 이질성이 갈등의 해소를 지향하는 변증법적 차이로서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비판과 견제의
논리로 이해되고 있었다면, 그들은 매우 건강한 공동체로 지속되었을지도 모른다. (……) 이 공동체의 후속 역사는 차이의
해소를 지향하는 패권투쟁에 돌입했고 결국은 각각 다른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p.79).

또 하나의 화두 : 포비아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민족주의

2009/11/14 – [생각하기/요즘 일어난 일들] – 미누와 용산을 기억하면서 환대를 다시 물어본다 –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가 있다. 잘 나가고 도덕적이고 권세가 있었던 사람들이 외면한 환자에게 기름을 부어주고 치료를 부탁한 이는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얼마나 이방인에게 ‘환대’를 베풀고 있을까. 벌써부터 여기저기에서 ‘적대’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랑시에르의 말처럼 ‘정치’가 작동을 멈췄기 때문일까? 김진호는 이를 근대의 ‘낯섦’에 대한 불안함 때문이라고 읽는다. “근대는, 근대의 경험은 ‘낯섦’으로 가득하다. 낯설기에, 그 낯섦에도 끊임없이 타인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이기에, 그 낯선 타인들과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일어날 사태들을 미리 충분히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사람들은
존재가 불안하다
“(p.125). 사람들은 손쉽게 이러한 불안을 ‘상식’에 기대어 생각하기 시작한다.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서 지금 우리 일자리가 없어진다.” 식으로. 그리고 어떤 ‘권위자’들의 말에 기대어 그것들은 어느새 ‘확실성’의 영역에 진입한다. “참으로 확실성이라는 것은 황당한 기억술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이 황당한 것을 그토록 확실한 것인 양
생각하게 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황당한 기억술을 확실한 것으로 보증해주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치’였다. (……)
다시 말하면, 확실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복주의적 욕망이, 즉 타인을 자신의 시각 속에 가두어버리려는 권력의 욕망이 자신을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p.144).

그리고 그러한 확실성은 위에 언급한 대로 ‘정복주의적 욕망’ 혹은 지배욕을 위해 동원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포비아’ 혹은 낙인들은 그런 경로를 통해 형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들은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였다. “요컨대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적대해야 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구조는 유대 사회내에 ‘내적 장벽’을 낳았다. 편견과 배제의 사회적 장치는 유대 사회내에서 사마리아를 키워드로 작동하였던
것이다
“(p.84). 지금 한국에서 이주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2000년 전 유대와 사마리아와 빗대었을때 얼마나 다른가. 또 지금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또 얼마나 다른가. “유대주의 속에 내장된 반사마리아주의는 유대인 각자의 제각기의 상흔을 공적 증오심으로
대체해버린다”
(p.91).

사실은 그 ‘확실성’, ‘알만하다는 상식’의 편견 그 바깥에 현실이 작동한다. 어쩌면 랑시에르의 ‘프롤레타리아’, ‘셈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그런 실천을 이미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우리 동네의 아줌마들은 봉제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몽고, 네팔, 방글라데시 아줌마들의 월급이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같이 일하는 데 같이 돈을 받아야지. 명쾌한 합리성이 그러한 ‘확실성’의 편견을 뚫어버린다. 요한의 공동체는 그런 식으로 예수를 읽었다고 김진호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공동체는 특별하게 권세를 잡았던 것도 아니고 여기 저기에서 공박당하고 특별한 방식의 ‘예전’을 강화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같이 ‘자발적 소수자’로 살면서 자유로운 ‘영’의 세계를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어느 정도의 ‘영지주의’적 성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김진호는 이들을 통해서 권력 중심의 기독교에 대한 반론을 시도했고, 이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다.

다만 훨씬 더 간명하게 말했을 수 있을 것 같고, 그 논리의 간명함과 더불어진 예화들에 대한 친절한 해설이 있었다면 차라리 책의 내러티브가 더 살았을 것 같다. 물론 간간히 나오는 외부에 기고했던 글들의 접합은 그러한 기능을 하긴 하는데, 책의 본문과 조금은 뜬다는 기분이 든다. 꽉 짜여진 김진호의 다음 책을 기다린다. 칼럼과 논문이 아니라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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