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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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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 ![]() 이재유 지음/책세상 |
#계급과 계층, 그리고 이재유
공부 좀 했다는 사람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계급’과 ‘계층’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노동자 계층’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면 슬슬 열이 받기 시작한다. ‘계급’과 ‘계층’은 엄밀하게 다른 말이다. ‘계층’이라는 말은 ‘위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냥 마치 ‘자영업을 하는 계층’과 ‘노동을 하는 계층’ 같이 선택했다는 느낌을 주는 뉘앙스가 강하다. 설령 ‘상류계층’과 ‘하류계층’을 말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소득의 차이만 있을 뿐 그것들에서 나타나는 힘의 불균형이나 사회에서의 위계는 드러내지 않는다. ‘계층’을 ‘계급’으로 말하는 용례는 없다. 하지만 ‘계급’을 ‘계층’으로 말하는 용례는 빈번하고, 그걸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이 말할 경우 거기에는 분명한 ‘이데올로기’가 내포되어 있다. “계층론은 단순히 소득 수준에 따라 계층을 나누는 양전 분류의 성격을 띠는데, 어떤 기준을 가지고 몇
개의 층으로 나눌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 계층에 관한 이론은 왜 그런 계층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단지 이러저러한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p.15). 영미사회과학은 ‘계급’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누락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학을 공부했던 시절 열이 받았던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또 종종은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이 문제를 간과하곤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그들도 좀 엄밀하게 할 필요가 있다. 젠더’차이’라고만 말하는 게 얼마나 엄청난 ‘권력’의 문제를 간과한다고 언설하지 않는가. 구태여 맑스주의 페미니즘의 언어들을 구사할 필요는 없지만 계급의 문제를 간과하는 것들은 아무리 보아도 자충수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계급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고 싶어 책을 찾던 중, 일단 간결하게 쓰여진 개념에 대한 책을 찾기 위해 이재유의 책을 읽었다. 이재유. 예전의 혁명가와 동명이인. 그리고 학교에서 만났던 선배 철학자다. 맑스주의 이론으로 박사논문을 썼다가 한동안 박사논문이 통과되지 않아 곤란했던 그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그의 수업을 듣지는 않았지만 그와의 술자리를 술회하는 한 후배의 이야기는 이재유의 이름을 잊지 못하게 했다. 그의 맑스에 대한 사랑은 내 맑스에 대한 호감과 비할 데는 아닌 것 같다. 이 책에도 그러한 애정은 듬뿍 묻어 있다.
#의지로 읽어낸 맑스주의, 계급론. 적절할까?
하지만 문제는 그의 애정과 현대사회에서의 ‘계급’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교히 보고 싶은 내 욕망은 충돌한다. 난 그 정교함을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당 선언="">의 테제들을 좀 본 듯 하고, 베버리안들의 계급에 대한 분석 몇 가지를 좀 본 듯 하다. 그의 계급과 민중과 시민에 대한 개념정의는 이제는 좀 구태의연해 보인다. “계급이 각 재료들이 어떻게 쓰여서 어떻게 건축물이 완성되었는지 보여준다면 민중은 단지 그러한 재료들을 쌓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시민은 그 자체로는 지배-피지배의 관계, 빈익빈 부익부의 관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개념이다. 시민이란 형식적인
동의와 동등의 관계를 지향하는 시민 사회의 구성원을 뜻하므로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와도 같다“(p.15). 민중이라는 말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의미를 랑시에르 식으로 읽으면 똑같은 의미로 읽어낼 수도 있다. 구태여 프롤레타리아트를 계급 구성에서의 ‘노동자’로 말하는 것은 오히려 지나친 통계학적 환원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시민성도 급진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시민을 말하면 곧 바로 부르주아지를 호명한다는 것은 레닌주의자(사실은 80년대 스탈린주의자)들의 안 좋은 습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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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주장만 넘치는 것 같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계급은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는 사람들의 집합체’를 일컫는다. 이러한 계급 개념은 플라톤 시대부터 사회 · 정치
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분석 도구였다. 계급은 한 사회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위로, 사회적 불평등 · 불일치
· 불균형 등의 문제를 연구할 수 있는 개념이다“(p.22). 계급이 ‘가장 중요한 단위’인지 아닌지는 그냥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젠더의 차이, 인종의 차이, 여러가지의 ‘배제’의 메커니즘들과의 우위를 어떤 기준으로 말하는지를 이재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사회적 분업 및 교환의 발전은 씨족 공동체의 조직을 변화시켰다. 스스로 왕과 황제의 자리에 앉은 추장은 더 나아가 사회 공동
소유물을 자신의 사적인 소유물로 보호하고 노예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군대, 권력 기관,
법정과 감옥을 만들었다.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만든 이러한 기구들이 바로 국가의 기원이다“(p.28).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배 계급’의 의지로 국가를 기원했다는 것을 마치 이재유는 맑스나 엥겔스가 말했다고 전제하고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읽어보라. 추장과 지배 계급이 국가 기구를 만들었다기 보다,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조형했던 기구들이 중심화되면서 권력의 효과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의지’와 ‘의지’ 바깥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나는 맑스주의의 원전을 잘 읽는 팩트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의 ‘감정적’인 독해들이 일으키는 폐해를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자본가 개새끼”, “지배계급 씹새끼”가 맑스가, 엥겔스가, 맑스주의자들이 하고 싶었던 말일까?
또 한 가지를 지적해보자.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영역은 자본가가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려는 계기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계기로 구성되어
# 계급에 대한 이해, 기존의 공리에서 빠져나와 읽어내는 법은?
난 특별히 이재유가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보통 ‘맑스 운’ 하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계급을 말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들과 맞물린 ‘주체성’의 변화들을 이렇게 읽어내봐야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에 있다. 이를테면 이재유는 징후들을 읽어낸다. “대기업 사원이나 공무원같이 좋은 대접을 받는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를 묶은 밧줄보다 더
이렇게 말하면 우파들에게, 자본가들에게 털리기 딱 좋다고 할까? 옛날 운동권 농담에 ‘NL은 착하고 멍청하고, PD는 영악하다’ 뭐 이런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집요하지도 않은 좌파는 여기저기서 ‘인문학’ 강좌나 하다가 문닫고 살아야 할 판이다. 그것도 나쁘진 않은데 그들이 꿈꾸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는 그렇게 오지는 않을 것 같다. 좀 더 정교하고 영리한 판단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있다. 우리는 전자의 장소를 ‘공장 안’으로, 후자의 장소를 ‘공장 밖’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공장 안’에서는 계급 의식이
형성될 수 없다. 계급 의식이 형성되는 장소는 바로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노동자, 즉 비임노동자의 영역인 ‘공장
밖’이다“(p.124). 이에 대해서 지난 번에 읽었던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이 떠오른다(2010/01/15 – [보고 듣고 읽고 그리고 느끼다/사회과학] – 민주노조 운동, 아직도 대안일까? – 김원, 신병현 외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a>). 한동안 한국의 맑스주의자들은 ‘공장 밖’의 투쟁을 통해 ‘공장 안’을 바꾸려 했다. 그래서 민주노조 운동을 하고, 진보정당 운동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억압의 구체적 양상이 나타나는 곳은 ‘공장 안’이기도 했다. 그 문제는 늘 간과되고 이제 ‘민주노조’가 강력한 작업장들에서 벌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오히려 노조 간부들은 잔업을 많이 따고 초과 근무를 따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이재유가 바랬던 것은 어떤 것일까. 그가 지적하려던 것은 ‘게으를 권리’를 말하며 자본주의의 ‘본원적 축적’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중세 시대의 사람들은 일 년 중 반 정도만 일을 했다. 공휴일은 141일이나 되었다. (일을 해야만 하는) 평일의 기하급수적인
확대는 노동자들이 새로 도입된 기계와 경쟁해야만 했던 산업혁명 초기의 특징이다“(p.65). “기아는 가장 광폭한 동물도 길들일 수 있으며 가장 사악한 동물에게도 고상함과 예의, 복종과 종속을 가르칠
것이다. 일반적으로 빈민을 자극해 노동하도록 몰아갈 수 있는 것은 기아밖에 없다“(p.70). 이재유의 논리는 굉장히 허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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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자본주의적 노동의 밧줄에 몸을 묶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외국어 공부든 컴퓨터
강좌든 노동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애쓰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자신이 정말 원해서 배우고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이 원해서 하는 것인지 고민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인 양 생각해버린다“(p.74). 그런데 해석의 틀은 19세기 맑스의 원전에 갖혀있는 것이다. 들뢰즈와 ‘소수자 되기’를 말하지만, 그 맥락들은 사상되고 현재에 적합하지도 않다. 그냥 착하고 정의로운 것 같은데 협상은 못할 것 같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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