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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 그 바깥은 어떻게 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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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 ![]() 반다나 시바 지음, 한재각 외 옮김/당대 |
제왕절개 수술을 한 엄마, 그리고 작은 엄마, 외숙모들 – 의학의 통제
내 엄마는 나를 제왕절개 수술로 출산했다. 4kg의 아이가 엄마의 자궁으로 나오기에는 힘이 겨웠나보다. 12시간의 진통을 겪고 나서 도대체 자연분만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엄마는 내 얼굴을 수술 후 하루가 지나야 볼 수 있었다. 내 동생은 2kg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아기였기 때문에 자연분만이 가능했다. 이 일들은 1980년대 초반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런데 내 막내 작은엄마와 두 명의 외숙모는 두 명씩의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모두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들에게 산부인과 의사는 너무나 당연하게 제왕절개 수술을 권했다. 한국의 제왕절개 수술의 비율은 세계 최고에 달한다.
한국의 경우 가족과 친척 여성들과 함께 가정에서 출산을 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압축적 근대화’와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임신과 출산을 하는 일들은 모두 ‘산부인과’의 일이 되었다. 임신의 확인부터 출산까지 모든 절차는 의사의 손과 간호사의 돌봄과 함께 이루어진다. 임산부들은 늘 전전긍긍한다. 밭을 매다가 출산을 하는 농촌의 경우와, 조한혜정의 책 『한국의 여성과 남성』에 나오는 해녀들의 경우처럼 물질을 하다가 아이를 출산하는 경우는 이제 역사 다큐멘터리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다. ‘의학’이라는 이름의 과학들은 사람들의 자기 통제권을 제약하고 점차 자신의 몸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
생명과학의 발달, 지적 재산권, 약탈
근대 과학의 체계들은 인간들이 수 만년 동안 쌓아온 자연과의 관계를 통한 지식들을 ‘비과학적’이라며 사소한 것으로 만들고 과학의 통제 아래 두려 한다. 또한 이는 자본과 결탁되어 왔고 그 경향들은 전후 자본주의에서의 ‘생명과학’의 발달. 즉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의 발달로 이어졌다. 또 다른 한 편에서 TRIPs와 같은 지적 재산권에 대한 체계들은 GATT에서 WTO로 이어지는 세계 무역질서에 대한 논의들과 맞물려 기존의 자생적이고 창조적이었던 인간들의 지식에 대한 공격으로 전화되었다. ‘약탈’이라는 반다나 시바의 주장은 전혀 과장이 없다. 그 ‘약탈’은 지식들을 공유하고 생물학적인 다양성을 보존하면서 나름의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 했던 제3세계의 프롤레타리아 혹은 민중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쳤으니 말이다.
이러한 약탈들은 다른 한 편에서 ‘지식’과 권력의 유착 문제이기도 하다. 분자생물학에 대한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통해서 지속적인 환원주의 생물학을 강화시켰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과 같은 유전자 결정론적 입장들도 그러한 지식들을 재생산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에서 환원주의는 (……) 종의 수준에서 보면, (……) 단 하나의 종(즉 인류)에만 본질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다른 종들에 대해서는 도구적 가치만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이것을 1차 환원주의라고 부른다. 이어 환원주의적 생물학은 점차적으로 2차 환원주의, 즉 유전자적 환원주의로 성격이 변하면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모든 행태를 유전자로 환원하려는 시도를 한다”(p.57).
본원적 축출, 그리고 자연의 약탈과 민중의 착취
1단계로 함께 밭을 일구던 공공의 공간들이 매각되기 시작하였다. 댐을 짓거나 운하를 파거나, 광산을 개발하거나 양식장이 생겨난다. 그 공간들은 다른 한편에서 ‘원조’로 진행되곤 하지만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원조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다. ‘청색 혁명’은 이런 것이었다. 2단계에 이르면 “농업 · 임업 · 수산업 그리고 축산업 부문에서 단일 종의 재배를 유도해서 이것이 다양성을 대체하게 하는 기술적 · 경제적인 압력”이 등장한다. 여러 가지 다양한 작물을 키우던 밭에 상품 작물 하나만을 키우게 만들곤 한다. 자연이 갖고 있던 자기 회복력 혹은 복구능력(resilience)은 점차 파괴되고 있다. 물론 반다나 시바의 농업에 대한 이해는 딱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한국은 이미 몇 백 년 전부터 단작을 실시해왔다. 논이 대표적인 경우다. 단작이 꼭 생태적 파괴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는 그러한 단작을 하면서도 생태적 관리를 하느냐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서구과학을 통한 비료-생화학 농업-이 그러한 방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씨앗을 만들고 그것들을 농민들에게 판매한다. 그리고 농민들은 그 씨앗으로 경작을 하지만, 거기에서 얻는 씨앗을 다시 활용할 수는 없다. “TRIPs협약의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지적 재산권은 사적인 권리로만 인식된다. 여기서는 마을의 농민들 사이에서, 숲의 부족민들 사이에서, 심지어 대학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지적 공유물(intellectual commons)’ 형태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지식 · 아이디어 · 혁신을 허용하지 않는다. (……) TRIPs협약의 27조 1항에 따르면, 혁신은 산업분야에서 응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산업조직 밖에서 생산하고 혁신하는 모든 부문들을 즉각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와 동시에 지식과 자원의 원소유자들이 전통적인 공동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해적질’과 ‘도둑질’로 둔갑해 버린다”(p.32). 특허권과 지적 재산권을 ‘해적질’하고 ‘도둑질’했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종자에 대한 생명공학의 활용에 어떤 비용도 청구하지 않고 ‘생물 자원 탐사’에 기꺼이 응했다. 마치 아메리카 대륙에서 콜럼부스을 비롯한 구대륙의 사람들에게 환대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피’의 복수였다. 그리고 도둑놈이라는 낙인이었다.
미개척지 – 여성의 몸
이러한 특허와 지적 재산권의 이야기들은 점차 진행되어 여성의 몸으로 향한다. “재생력의 원천으로서의 씨앗과 여성의 육체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상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식민지이다”(p.93). 식민지는 약탈당하기 시작한다. “남성 전문가에 의한 여성 생명의 통제를 확립하기 위해 가부장적인 과학과 법률은 서로 협력한다. 이리하여 재생능력과 연관된 여성의 권리는, 생산자로서 의사가 갖는 권리와 소비자로서 부유한 불임부부가 갖는 권리로 대체되어 버렸다”(p.116). 게다가 여성의 치료에서 나오는 호르몬들에 생명과학은 ‘특허’를 붙여버렸다.
억눌린 자들의 몰락, 그리고 생명과학의 자기모순
요컨대 지식의 문제와 제국주의적 약탈,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강하게 질주하는 ‘전지구적 변환’ 혹은 세계화는 연동되어있고, ‘종의 다양성’과 ‘제3세계 억눌린 자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는 명백한 ‘자연과 지식’의 약탈이 되는 것이다. 영화 <소똥>에 나오는 자살하는 농민들을 보라. 삶의 터전의 무너짐과 자본주의적 질서를 통해 ‘소비’ 없이, ‘자본’없이 살 수 없는 상황들은 그들에게 삶 자체의 몰락을 주었던 것이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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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았다. 완전무결할 것 같았던 생명과학의 기술들은 자기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화학 농법들은 형질 변화 유전자로 인해 ‘슈퍼 잡초’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러한 방식들을 다시금 똑같은 ‘새로운 농약’으로 해결해내는 것들은 점차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 되고 있다. 또한 정크DNA라며 사소하게 생각했던 것들 때문에 또 다른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들이다. 아직 그 내용이 밝혀지지 않았던 95%의 정크DNA들은 지속적으로 유전자 변형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게다가 사소해보였던 다른 종들의 멸종들은 생태계 교란을 통해 또 다른 문제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생명공학의 시대는 자기모순의 덫에 빠진 것이다.
달리 살아가는 사람들의 반격
그리고 이제 달리 살아가는 사람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책의 저술 시점인 2000년의 1년 전인 1999년 시애틀에서 있었던 반세계화 시위의 화두에는 반생태적인 초국적 기업의 농업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그보다 앞선 6년 전에는 델리에서 “농민의 권리(farmer’s right)에 관한 헌장”이 만들어졌다. 영화에서도 나오는 유기농을 통한 씨앗의 ‘사티아그라하’는 자치, 즉 스와라지의 경험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은 “지역사회에 종자은행을 건립해서 농민들에 대한 씨앗공급을 강화해 나가고, 서로 다른 지역들 각각에 적합한 지속 가능한 농업적 선택조건을 찾아냄으로써 대안을 만들어내고 있다”(p.229). 또한 1993년의 집단적 지적 재산권(CIR, collective intellectual property rights)에 대한 이야기들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생물민주주의를 주창했다. 영화의 막바지 코카콜라의 공장을 철수시키는 반다나 시바의 이야기는 통쾌함 마저도 주곤 한다.
물론 여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기획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지적 재산권과 특허권, 그리고 생명과학의 논리로 무장한 이들에 대해 여전히 미약하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삶을 기획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튼튼하며 ‘창조적’이며 활기가 있다. 이 활기들과 창조성을 어떻게 계속 보전하면서 다른 삶을 기획할 것인가. 그 지점이 지금 우리가 사유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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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반다나 시바에 대해 좀 더 정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리처드 르원틴의 지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르원틴은 “추측하건대 더 큰 선을 위해서 이를, 저는 이를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부를 텐데 그는 다르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정당화할 수
있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 걸 용인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결국에는 사람들이 이를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냉소적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역효과를 낳을 겁니다.” 라고 주장한다. 에스트로겐에 대한 사실의 문제를 지적한 것인데. 다른 글들에서 어떤지도 좀 살펴봐야겠다. 아직 르원틴도, 시바도 잘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