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그리, 메시아의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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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 style="VERTICAL-ALIGN: top" align=left><A class=aladdin_title href="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239007&ttbkey=ttbpanic822253001&COPYPaper=1">비물질노동과 다중</A> – <IMG alt=8점 src="http://image.aladdin.co.kr/img/common/star_s8.gif" border=0>
질 들뢰즈 외 지음, 서창현 외 옮김/갈무리</TD>
<IMG alt="" src="http://image.aladdin.co.kr/cover/cover/6000239007_2.jpg" borde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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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바탕글 style=”TEXT-ALIGN: right”> 

<P class=바탕글><FONT color=#112a75>-고백 혹은 지껄임</FONT></P>

<P class=바탕글>나는 네그리‘빠’였다. 2004년 학부 4학년. 심지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겠다는 정치학도였던 나는 ‘다중의 활력’과 ‘탈영토화’된 ‘전지구적자본주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철학과 경제학을 복수전공하며, 철학과와 경제학에서 ‘고군분투(?)’했다. 이미 전지구화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외부’는 없다! 남는 것은 다중의 ‘제국’에 대한 ‘내파’였다. 그것은 오로지 ‘활력’(puissance)로만 가능할 지어다. 다시 읽는 네그리와 자율주의의 해석을 읽어내며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였을까.</p>

</SPAN></SPAN>


<P class=바탕글><FONT color=#112a75>-네그리와 랏짜라또의 테제에 대한 검토와 평가</FONT></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1. 테제</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1)노동은 완전히 비물질노동으로 변형되며, 노동력은 ‘대중의 지성’으로 변형된다. (맑스가 ‘일반지성’이라고 부른 것이 지닌 두 가지 측면)</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2)’대중의 지성’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주도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p.290).</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2.근거</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1) 포스트포디즘의 시대가 도래했다.</SPAN></P>

<P class=바탕글>일단 포스트포디즘이라는 말이 문제적이다. 포스트포디즘은 “<FONT color=#5c7fb0>포드주의적 노동자가 패패배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포스트포드주의 모델의 변종들을 구성하고 있는, 즉 생산 속에서 더욱더 지성화된 산 노동의 중심성을 승인하는 증거</FONT>”(p.288)이다. 이제 자본주의는 ‘노동’의 근대적 착취 형태를 통해 이윤을 만들지 않는다(맑스가 이것 뿐만을 이야기했었던가?). 탈근대적인 자본주의의 상황에서 “<FONT color=#5c7fb0>조직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노동자의 인격성, 노동자의 주체성이다. 노동의 질과 양은 노동의 비물질성을 축으로 하여 재조직되어야만 한다. 노동자의 노동이 통제의 노동으로, 정보관리의 노동으로, 주체성의 투여를 필요로 하는 결정능력의 노동으로 이처럼 변형된 것은 (……) 이후에는 마치 비가역적인 과정인양 일어나게 된다</FONT>”(p.288).</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2) 노동의 전환 – ‘산업사회’의 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SPAN></P>

<P class=바탕글>이제 중요한 것은 “<FONT color=#5c7fb0>오늘날 노동력이 지닌 사용가치와, 보다 일반적으로 탈산업사회 안의 모든 생산적 주체의 활동 형태가 지닌 사용가치이다. 숙련노동자의 ‘소통 모델’은 이미 결정되어 있고, 구성되어 있으며, 그 잠재력(potentialité)도 이미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청년 노동자, ‘임시’ 노동자, 청년 실업자의 소통 모델에서는 순수한 잠재성(virtualité), 즉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면서도, 이미 탈산업적인 생산적 주체성이 지닌 모든 특성을 가진 능력(capacité)이 발견된다</FONT>”(pp.288-289).</P>

<P class=바탕글>새로운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능력들. 이 능력들은 들뢰즈의 개념들을 따르자면 ‘정동적’인 것일테다. 네그리과 랏짜라또의 주장은 결국 이 ‘잠재성’을 가지고 ‘혁명’을 하자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는 계속 길게 부연하는 형태로, 자신들의 근거를 확증하는 형태로 펼쳐진다.</P>

<P class=바탕글>일단 노동 체계가 변했다. “<FONT color=#5c7fb0>모든 3차 산업 활동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원이 행하는 연구, 구상, 관리(gestion) 활동은 정보전산망 내에서 서로 교차하고 배열되며, 그것들을 통해서만 생산 주기 및 노동 조직화가 설명된다. 과학적 노동의 산업적, 3차 산업적 노동으로서의 통합은 생산성의 주요 원천 가운데 하나가 되며, (……) 생산주기 전체를 관통한다</FONT>.”(p.289). 이러한 통합적인 ‘정보전산망’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P>

<P class=바탕글>네그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구절들을 통해 ‘일반지성’이라는 의미를 상기시킨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FONT color=#5c7fb0>실질적인 부의 창출은 (……) 행위자들(agents)의 역량에 의존한다. (……) 직접적 노동시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FONT>”(p.291). 그렇기 때문에 ‘노동시간’은 부차적이란다.</P>

<P class=바탕글>비물질노동이라는 개념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이것이다. “<FONT color=#5c7fb0>비물질노동의 활동에서는 노동시간을 재생산시간이나 생활시간과 구별하기는 더욱더 어려워진다. 사람들은 생산시간과 향유시간을 분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총체적 생활시간(un temps de vie global)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FONT>”(p.295). 네그리와 랏짜라또의 판타지는 메시아적이다. ‘총체적 생활시간’에서 ‘잠재성’이 튀어오르면 혁명이다! “<FONT color=#5c7fb0>그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노동이 비물질노동으로 변형된다고 한다면, 또 비물질노동이 생산의 근본적인 토대라는 점이 인식된다면, 그 과정은 단지 생산뿐 아니라 ‘재생산-소비’ 주기의 전체 형태에도 투여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물질노동은 주체성의 재생산형태 속에서 재생산되는 것이지 착취형태 속에서 재생산되는 것은 아니다</FONT>”(p.295). 온갖 야바위와 확인되지 않는 전제들은 점차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우리에게 요구한다. “다중의 잠재성과 활력을 믿지 않을테냐?!” </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3) 비물질노동은 혁명의 ‘향유’를 하게 한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지식노동’, ‘비물질노동’, ‘정동노동’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체계에서 “<FONT color=#5c7fb0>주체가 생산과 맺는 관계는 더 이상 자본에 대한 단순한 종속관계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 관계는 자본에 의해 부과된 노동시간의 독립성의 측면에서 설정된다. 두 번째로 그 관계는 착취에 대한 자율성(autonomie)의 측면에서, 즉 향유(jouissance) 능력으로 나타나는 생산적, 개인적, 집단적 능력으로서 설정 된다</FONT>”(p.295). 향유라는 말을 들으니 라깡이 떠오른다. 상징계에서 대타자의 질서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가운데 특정 국면에서 잠시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향유(jouissance). 결국 주체의 착취에 대한 자율성을 구성은 특정 국면에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항의 정치학은 ‘쓰일 수’ 없다. 조정환의 책 제목이 『미네르바의 촛불』이었던 것은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4) 68혁명의 판타지. ‘미네르바의 촛불’</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미네르바의 촛불’이 가능한 조건을 한 번 만 더 살펴보자.</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FONT color=#5c7fb0>(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 가운데 생산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에 대항한 생산적 활동의 독립성과, ‘대중의 지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둘러싼 자율적 주체성의 구성과정이라는 두 가지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우선, 자본주의적 지배와 관련하여 지성적 노동력과 비물질노동력으로서의 노동력의 독립성이 증가한다. (……) 기업가의 기능이 이것[사회적 노동의 사회적 협력]의 원천이 되고 이것을 조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오히려 기업가의 기능이 이것에 적응해야만 하는 어떤 독립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기업가의 기능, ‘자본의 인격화’는 (……) 오히려 그러한 협력의 독립적인 접합(articulation)을 승인하고 그것에 적응해야만 하는 것이다</FONT>”(p.296). “<FONT color=#5c7fb0>즉 생산의 모든 요소들에 대한 통제가 자본가들의 의지와 수완에 종속되던 시대는 끝난다. (……) 오늘날 기업가는 노동과정의 생산적 조건들을 집결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기업의 착취에 필요한 정치적 요소들을 집결시키는 데 몰두해야만 한다</FONT>”(p.297). “<FONT color=#5c7fb0>맑스적 노동력 개념은, 들뢰즈와 푸코가 발전시킨 것처럼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과정이 된다. (……) 주체성은 절대적인 잠재력의 요소가 된다. (……) 자본주의적 기업가는 주체성의 생산과정에 더욱더 외재적이게 된다. 주체성의 생산과정, 다시 말해 생산과정 전체는 자본관계의 ‘밖에서’, 대중지성의 구성적 과정을 ‘축으로 하여’, 즉 노동의 주체화 속에서 구성된다</FONT>”(p.301).</SPAN></P>

<P class=바탕글>과연? 자본주의는 주체성을 생산하지 않나? 과연 자본주의적 지배의 상황에서 지성적 노동력과 비물질노동력으로서의 노동력의 ‘독립성’이 증대하는가? 자본가와 그들을 위한 ‘체제’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닐는지? 한국의 대졸자 ‘88만원 세대’를 보라. 그들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무산자(‘프롤레타리아트’)의 상황에서 ‘스펙 경쟁’에 몰입되고야 만다. 그들은 여전히 ‘잠재력’의 시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자본관계는 이미 통제체제를 구축하고 있지 않나? 다시 질문해야하는 것은 그 ‘주체성’의 ‘강밀도’ 뿐만이 아니라 그 ‘방향’의 벡터를 통제하는 구닥다리로 묘사되는 ‘자본관계’의 힘(pouvoir)의 작동 아닐까.</P>

<P class=바탕글>네그리와 랏짜라또는 68혁명을 통해서 왜 쓸데없이 ‘지식인’인 대학생들이 데모를 했는지를 통해 뭔가를 살려보려 한다. “<FONT color=#5c7fb0>알려진 어떤 혁명모델과도 닮지 않은 이 혁명은 권력과 주체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형이상학’을 내포한 현상학을 드러내 보인다.</FONT>”(p.299). ‘복수적’, ‘이질적’, ‘횡단적’의 말이 난무한다. 이는 하나의 판타지의 계열을 구성한다. 구좌파적으로 68을 독해해도 그(녀)들의 저항의 이유는 설명할 수 있다. 한국의 87년도 마찬가지. “<FONT color=#5c7fb0>지성은 더 이상 생산기계와 분리되지 않는다. (……) 지성이 개입하는 것은 집합적 배치 자체의 수준에서이다. 따라서 노동세계의 내부에서 직접 생기는 비판적이고 해방적인 활동이 중요하다. (……) 비물질노동의 협력이 지닌 거대한 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지성은 여기서 해방이라는 목표와 완전히 부합하게 된다”. 이제 문제는 ‘새로운 주체, 구성 권력, 코뮤니즘의 역량</FONT>’(p.307)이다. </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FONT color=#5c7fb0>다시 말해서 대안은 권력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역량의 수준에서 구성된다. (……) 산업사회가 지닌 오랜 적대는 적대적인 주체들 사이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확립했으며, 결과적으로 ‘이행’을 적대적 세력들의 승리 쪽에 주어진 권력 상황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 따라서 적대적인 구성은 더 이상 주어진 자본주의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이것과의 단절에 의한 분리에서, 봉급 노동에서가 아니라 이것의 해체에서 시작하는 분리에서, 노동의 형상에서가 아니라 비-노동의 형상이라는 토대 위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FONT>”(p.302). 글쎄다. 그 역량은 어디를 향하는가? 자본관계를 해체하는 방향일까, 재생산하는 방향일까? 어쩌면 네그리와 랏짜라또에게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SPAN></P>

<P class=바탕글>네그리와 랏짜라또는 구좌파의 반박을 예상하나, 그들이 생각하는 ‘구좌파’는 누구일까? “<FONT color=#5c7fb0>첫 번째 반박은 고대적 형태의 노동이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반박은 자본주의적 변증법이 세계 전체를 가로질러 그 최종 결과물을 생산하는 바로 그 지역에서만 ‘일반지성’ 형태의 노동이 주도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FONT>”(p.303). 그들의 전제들을 모두 전적으로 추인하더라도, 그들의 ‘주체성’과 ‘혁명’에 대한 테제는 여전히 취약하다.</P>

<P class=바탕글><FONT color=#112a75>– 문화연구와 네그리, ‘현대 자본주의’</FONT></P>

<P class=바탕글>사실 네그리와 ‘자율주의’의 연구들은 기존의 ‘문화연구’의 방법들과 관련짓는다면 굉장히 많은 사기 진작(empowerment? 또는 encouraging?)을 주긴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징후 포착’을 통해서 테제를 구성하는 능력은 알튀세와 부르디외, 푸코를 읽으면서 ‘뚫리지 않을 것 같은’ ‘외부도, 내부도 없는’ 자본주의의 바깥을 사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응원’을 해주곤 한다. 구조 제약 속에서도(그것이 아비투스의 결을 통해 재생산되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통해 저절로 호명하게 만들든) 끊임없이 ‘위반’과 ‘교란’하는 행위자들을 찾고 싶었던 이들에게,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내파’와 ‘주이상스’의 ‘미네르바의 촛불’ 같은 국면을 설명해주는 네그리의 이론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메시아주의의 강림이다. 믿거나 말거나.</P>

<P class=바탕글>그런데 잠깐 그들의 테제로 돌아가 보자.</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1)노동은 완전히 비물질노동으로 변형되며, 노동력은 ‘대중의 지성’으로 변형된다. (맑스가 ‘일반지성’이라고 부른 것이 지닌 두 가지 측면)</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2)’대중의 지성’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주도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p.290).</SPAN></P>

<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대중의 지성’은 도대체 ‘어떤’ 주도적인 주체가 될 것인가? 그들의 ‘잠재성’, 그리고 그 ‘잠재성’을 만드는 ‘비물질 노동’과 ‘정동 노동’은 어떤 ‘주체’로 작동할 것인가? 이 주장들을 갖고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나 역시 ‘대중의 지성’을 신뢰하지만, 그것에서 멈출 순 없다. ‘생각대로 되는 건’ 한 통신 자본의 가입자 수 증가 아니었나?</SPAN></P>**– 덧 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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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들뢰즈의 <정동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반가웠다. ‘잠재성’에 대한 들뢰즈의 사유는 늘 참조되어야 한다. 그 뒤에 이어진 마이클 하트의 <정동적 노동="">까지 좋았다. 지금의 노동의 형태가 그렇게 변해간다는 것은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곧 이어 점프가 이어진다. 랏짜라또와 네그리의 글이 그렇다. 절정은 조정환과 정남영과 승준의 글이다. 특히 정남영의 글은 어이가 없어져 버린다. ‘과학’은 그의 손에서 손쉽게 기각되어 버린다. 그가 말하는 과학은 현대과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p>

종종 목적론과 비판은 연동될 수밖에 없다고는 본다. 하지만 ‘분석’이 ‘메시아의 재림’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아니 뭐 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렇게 되면 그 영역은 곧 ‘신도’들의 ‘믿음’의 영역일 따름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비판을 위한 기획에 있어서 자율주의는 어떤 면을 기여할 수 있을까? 비물질노동에 대한 분석도 오히려 지금 읽고 있는 <감정노동> 같은 책이 훨씬 더 많은 영감을 준다.

그리고 여전히 네그리는 <그룬트리쎄>는 읽은 것 같지만 <자본> 1권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가 꼭 <자본>을 읽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상품’장에 나왔던 페티시즘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과연 네그리가 현대 소비자본주의와 결합된 마케팅을 볼 때 기각할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싸늘해 지는 것은 순전히 감정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