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노동, 비물질 노동, 젠더위계

감정노동8점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가람 옮김/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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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네그리, 하트, 랏짜라또의 『비물질 노동과 다중』을
읽었다. 그들의 주장은 간결했다. 포드주의체제가 붕괴한 상황에서 노동의 헤게모니는 기존의 ‘육체 노동’에서 ‘정동
노동affective labour’ 혹은 비물질 노동으로 전환된다는 것. 그리고 그 ‘정동 노동’ 혹은 ‘비물질 노동’은
결과적으로 잠재성의 영역에 있으며 이는 해방적 주체를 생산하기 때문에 혁명의 능력puissance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정동
노동’의 영역에는 돌봄 노동과 갖가지의 ‘감정 노동’들이 포함되었다. 네그리와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은 과연 온당한 것일까? 이에
대한 반박은 여러 가지 층위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노동의 성격 안에 있는 계급투쟁(혹은 계급의 경합)이 사상되어있다는 것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 편에서 가치와 사용 가치, 그리고 교환 가치 안에 있는 성격에 대한 불일치(적대)가 어떻게
차이로 전화되고 또 다른 한 편에서 위계로 재편되는지에 대한 문제가 사상되어있음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실드의
『감정노동』은 또 다른 한 편에서의 주요한 경험적 연구의 반박이 될 수 있다. 간결하게 이야기하자면, 네그리의 주장에는
감정노동이라는 것에 대한 구체적 진술이 없이 현학적인 진단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성주의적 문제제기들이 끊임없이
제기해온 ‘돌봄 노동’의 양상에 대한 비판이 전혀 수용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모순적이고
적대적으로 펼쳐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하나의 ‘경향’으로 환원함으로써 실천적 영역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미래로 갈 수 없다는
점에 있다.

혹실드의 『감정노동』은 가능한 많은
방법들(통계와 인터뷰를 종합)을 모두 사용하여 감정노동의 양상을 살핀다. 그 분석은 정신분석학에서부터 민족지학까지의 학제를
넘나든다. 꼼꼼한 자료들을 통해 나타낸다. 포드주의적 노동방식이 사라져가던 1980년대 혹실드의 연구시점에서 미국 노동자 중
3분의 1정도가 ‘감정노동’이 필요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여성 노동자 중 절반 정도가 감정노동이 필요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직업 수행에 있어서 어떤 ‘감정 노동’을 경험하고 그 경험들은 본인의 자아와 어떻게 마주쳤을까?

혹실드는 감정이 주어진 것이라는, 어떤 외재적인 실재로 간주하는 것에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상호작용 한다. 따라서 감정에 대해 ‘관리’라는 측면을 도입해서 분석할 여지를 만든다. 그런데 동시에 감정은
사적으로 경험된다. “감정노동은 우리가 감정에 귀 기울이는 정도에 영향을 주며, 때에 따라서는 감정을 느끼는 능력 자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서비스 산업 위주의 이른바 ‘3차 서비스 산업’의 헤게모니가 관철되었을 때 이러한 감정노동은
‘시장화’되기 시작한다.

경영 기법의 발전은 혹실드의
연구 참여그룹인 승무원들에게 ‘자기 경영’을 제안하고, 감정에 대한 요구를 한다. 그녀들은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먼저, “어떻게 하면 내가 내 직업상의 배역과 회사에 녹아들지 않으면서도 정말 잘 맞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그녀들은 이에 대해 상황을 ‘객관화’하는 방법을 택한다. 내면 행위 기술의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만들면서 스트레스를 통제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감정이 상하지 않고 ‘연극적 자아’을 만들기 위해 표현에 대한 연기, 그를 위한 상황에 대한 감정이입과 기구들을
통한 내면 행위를 수행한다. 그녀들은 ‘일하지 않는’ 자아를 ‘진짜’ 자아로 추인하고 싶지만, 점차 위기는 다른 방식으로 또한
진행한다. 두 번째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행동하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과 분리된 상태에서 내 능력을 쓸 수 있을까?”하는
상황이다. 마음이 우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행기 객실을 ‘거실’처럼 생각하려해도 표정 행위만 가능할 뿐, 내면 행위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이 ‘사기꾼’으로 느껴지는 순간으로 다가온다. 이것을 해결한다 하더라도, 세 번째 질문이 등장한다.
“내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내면 행위를 하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냉소적으로 되지 않으면서도 내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녀들의 승무원이라는 일 경험은 끊임없이 경합하고 있다. 하지만 잠시 찾은 균형은 미국의 경기침체에 이어
등장한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레이건 정부 이후의 노동규율체계에 의해 다시금 흔들린다. 효율성을 요구하는 자본은 인원을 삭감하고,
장기간의 비행시간에 증편이 시작된다. 그 상황에서 ‘내면 행위’가 불가능한 조건들은 강화되고 고용주는 그 상황에서도 더 충실한
‘감정 노동’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8장의 「젠더,
지위 그리고 감정」의 장은 실제로 남녀간의 감정노동이 과연 균등한지에 대해 다시 묻는다. “여성이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남성에게도 의미를 지닐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p.207). 여성이 남성보다 하위에 있는 사회 계급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부장적 젠더규범이 재생산하는 ‘여성성’에 대한 구성은 ‘감정노동’을 ‘여성화’된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들의 반영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이 통계적 자료와 인터뷰들을 통해서 나타난다. 남성 승무원과 여성 승무원에 대한 승객의
반응. 남성 승무원에게 기대되는 것은 여성 승무원을 관리자로서 거느리며 경영자 과정으로 승진하는 것이고, 여성 승무원에게 기대되는
것은 결혼을 언제 할 거냐는 것이다. 돌봄 노동에 대한 수행에 있어서 쭈삣거리는 남성 승무원들과의 대조는 성역할이 공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성 승무원에게 기대되는 것은 ‘섹시한 여자’와 ‘엄마’ 역할인 것이다. 게이
승무원에 대한 여성 승무원들의 기대는 일터의 젠더규범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일의 순간순간마다 벌어지는 여성 승무원들의
감정선의 움직임은 특징적인 여성의 일 수행에서의 ‘감정 노동’을 잘 보여준다. 결국 남는 것은 ‘자존감’의 문제이다. 그 긴장은
구조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처음 위에 언급한
‘정동노동’, ‘비물질 노동’의 잠재성은 ‘감정노동’과 마주보았을 때 허망한 이야기가 된다. 그 노동들이 ‘잠재적’이려면
‘자존감’의 파괴가 없어야 하는 것인데, 늘 연극적 자아들의 ‘내면 행위’와 ‘표면 행위’들은 계속 자신의 ‘진짜’ 자아와
부딪히면서 긴장상태에 있고 이는 ‘쇠진burnout’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잠재적’일 수가 없이 계속 기진맥진하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그것들은 젠더위계에서 탈피해 있지 않다. 그리고 첨단화된 경영기법들은 그것들을 평가하고 배분하고 분류하여
‘고용불안’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통제기법으로 적용된다. 현대사회에서의 ‘혁명’에 대한 낙관론이 가리고 있는 ‘새로운 방식’의
‘시장화된’ 감성노동에 대한 혹실드의 분석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20년도 더 된 이론이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등장하는 새롭다는 ‘탈근대적’ 이론들은 굉장한 도약으로 그것들을 새롭게 말하려 한다. 해결되어야 할 것들은 잘 해결되지 않고,
새롭게 갱신된 ‘이름’의 이론들만 나타난다. 다시 꾸준한 경험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판타지를 넘어 새로운 대안담론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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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코노미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