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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가 추적하는 남성성의 계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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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남자 만들기 – ![]() 박노자 지음/푸른역사 |
박노자는 예민한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사회적 위치들이 그를 예민하게 만든다. 데리다는 언젠가 이방인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게 있다고 했었는데, 그건 박노자의 경우 그리고 좀 더 넓혀본다면 자메이카 출신의 문화연구자 스튜어트 홀의 경우를 봐서도 확실히 맞는 것 같다. 다른 경우를 또 생각해보자면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본다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한국사회가 펼쳐질 것이다. 이는 개인적 경험에 있어서는 종종 폭력적인 체험의 누적이 될 수 있기도 하다. 그 만큼 많이 다칠 수 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박노자의 그러한 ‘이방인’과 ‘내지인’의 경계에서 왔다갔다하는 정체성들은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들을 낯설게 하는 계기로 다가오곤 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등의 평론들은 한국인들의 눈을 뜨게 하곤 했다. </p>
<씩씩한 남자="" 만들기="">는 예전의 글들과 성격이 좀 다르다. 이 책은 논문을 책으로 구성했다. 따라서 드물게 한 선으로 죽 이어지는 논의를 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책은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이지만, 한 편의 논문을 잘 구성해서 편 책은 다른 가치를 만들고 종종 재미있기도 하다. 박노자의 <씩씩한 남자="" 만들기="">는 빨리 읽힌다. 재미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즉 근대의 도래와 식민기 시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을 드러내 준다. 이를테면 1910~20년대의 ‘여성’에 대해서는 여성주의자들과 국문학자들의 작업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밝혀지고 있지만 남성에 대해선 별다른 연구가 없어왔다. 모두 식민지에 복속해 왔거나 아니면 독립운동 했거나 식의 담론일 경우가 많다. 박노자는 약간 빗겨나서 근대의 ‘남성 주체’에 대한 탐구를 한다는 점에서 비어있는 공간을 재빨리 차지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p>
박노자가 보려는 건 무엇일까? “요즘식으로 말한다면 “남성다움의 담론”을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담론은 전혀 단선적이지도 단일하지도 않았다. 그 안에 수많은 모순과 갈등 등을 내포하고 있엇다. 지배 담론이라고 해서 일사불란하고 초지일관되게 통일된 모습으로 전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p.33). 푸코의 계보학적인 탐구를 연구 초반에 선포한다.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남성성이라는 것들이 계속 있어온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손쉽게 이야기하는 것들은 늘 많은 함정을 야기한다. ‘구체적’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들이 어떻게 갈등과 조정, 그리고 투쟁과 반목을 통해 이루어지는지가 손쉽게 누락되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표현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박노자의 분석은 어떨까?
“근대 초기 조선에 수입된 민족주의적 · 군사적 남성성 도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유교적 수사가 가미된
언어로 표현되고, 자제와 희생이라는 유교적 가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서 정당성을 얻었다. 이와 동시에 “애국 정신”에 어울릴
만한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는 압력도 상당했다. (……) 그러나 군대다운 군대가 없었다. (……) 요컨대 당시의
새로운 “이상적 남성”은 역사적 상황과 기존의 유교적 윤리 그리고 새로운 “진정한 사나이”의 이상 등이 복합적으로 상호 작용하여
탄생한 것이엇다“(p.41). 한국의 남성성은 조선 초기에는 계급적으로 많이 달랐다. “김구의 회고에 표현된 것과 같은 부류가 거친 남성성을 표출하는 모습. 분명 많은 선비들 눈에는 평민들이
심각할 정도로 교양과 수양이 결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비쳤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평민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사회적으로 용납받을 뿐만 아니라 장려되기까지 했다“(p.66). 평민들과 달리 “사대부 사회는 삶에 대한 집착을 끊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을 떠나 더 고상한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역량을,
김구가 속한 평민 사회에서 추앙되던 완력 과시보다 훨신 더 우위에 놓았다“(p.74).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봉건적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양분되어있었다는 사실이다. 분명 평민들의 사회가 ‘평등’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젠더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은 분명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 안의 남성들이었다. “사대부 사회와 평민 사이의 상반되는 “남성성” 비전 사이에 공동 분모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양족 모두에서 남성은 분명히 여성의 지배자였다“(p.82). 하지만 평민들이 ‘몸’을 쓰는 경제를 운용했으며 ‘문약’함과는 다른 방식의 남성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과 어느 정도는 배치된다. 그리고 다른 자료들에서도 밝혀지지만 그들의 ‘섹스 모럴’은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에 나오는 중세 사회처럼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자유롭기도 했다. 이데올로기는 500년이 지나도 완전히 평민들을 장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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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근대’를 수용해야하는 상황에서 사대부 이데올로기는 커다란 도전에 직면한다. 다른 ‘몸’을 가져야 한다는 요청을 받게 되고 갑자기 평민들의 ‘호전적’인 석전 등등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해석들이 쏟아진다. 갑자기 장수들의 이야기들이 위인전으로 발간되어 읽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한다. ““재발견된” 신라와 고려의 전쟁 영웅들 또는 조선의 넬슨과 나폴레옹으로 칭송된 이순신, 을지문덕과 같은
상무적이고 강인한 남성성이 근대 지향적인 상층 및 중층 계급 남성들의 상상력을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 평민들의 “남성적
가치”(담력 등)도, 양반들의 “남성적 가치”(금욕, 자제력, 의분 등)도 결국 다 같이 근대적인 남성성으로 수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근대적 남성성 구축의 필수 조건인 “정기적 훈련/규율”은 개화기에 접어들어야 충족될 수 있었다“(p.83).
무력의 예찬들이 시작하지만, 이는 곧 이어 ‘군대’ 담론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정교하게 규율화된 신체에 대한 요청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훈련”, 근면, 애국열이라는 “국민화”되고 잘 통제되고 승화된 남성성에 대한 “주류”의
비전이 조선의 근대적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거기에 “공중 도덕”, “의무감”, “자기희생”, “상무 정신” 등 일본과 중국
매개자들의 강조가 덧붙여졌다“(p.97). 학교에서의 제식훈련에 대한 근대 남성 지식인들의 열광은 이런 인식을 뒷받침 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국민’을 발견한다. “근대적 남성의 새로운 모델은 무엇보다 “근대의 선구자”인 학생이었다. 학생들의 운동회나 체조, 군사 훈련
등은 그들을 “애국적이고 심신이 건전한 국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핵심적 과정으로 인식되었다. 학생들이 규율과 국기에 대한 사랑을
익히는 운동장은 “국민”의 요람이었다“(p.112).
하지만 이러한 담론과 상관없이 조선의 민중들과 심지어 엘리트들의 몸은 변하지 않았다. 그 ‘학생’들이 있었던 곳도 알고 보면 서울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들이 바라던 근대적인 ‘애국자 모델’인 경찰과 군인은 무시당하고 사고나 치는 골치덩이였다. 쉽게 타성을 버리지 못했고 근대적 질서에 아직 적응을 못 한 것이다. “권총을 손에 들고 서빙고에 사는 부유한 상인의 집을 털던 쉰 명 남짓의 무장 강도떼에게 완전히
무시당하는가 하면, 강도짓을 목격하고도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고, 장기를 두다가 자기들끼리 심한 다툼을 벌이거나 경찰서 코앞에서
“감히” 장죽을 물고 담배를 피우려던 친위대 소속 병사들과 격렬한 주먹싸움에 휘말린 적도 있었다. 군인들이라고 달랐을까? 그렇지
않았다. 힘없는 행인으로부터 우마를 강제로 빼앗아 푸줏간에 넘기거나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토색질, 노략질을 하는 일에 관행적으로
관여하곤 했다. 반면 사회적 먹이사슬에서 자신들보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근대 군대의 규율을 부과하지 못하는 등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자의 전형을 보여주었다“(p.118).
이런 ‘근대적 신체’와 ‘남성성’은 잘 퍼지지 않고 저항에 맞닥뜨리게 되기 일쑤였다. “다수의 남성을 규율화할 만한 징병제 군대도, 다수의 아동에게 정기적 체육 교육을 실시할 의무
초등교육 제도도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남성성 패러다임은 주로 신문과 잡지 등 근대적 매체들을 통해 전파되었다. 물론 다수의
조선인들은 근대 매체를 직접 읽지 못하는 문맹자 농민이었다. 그러나 100년 전의 조선은 낭독의 문화가 살아 있는 땅이었다. 즉
근대적 매체의 전파력이 깨나 강했던 시공간이었다“(p.138). “훈육되고 군사화된 남성이라는 새로운 모델은 태평양전쟁의 “총동원” 기간 중에 그리고 1945년 이후
남한과 북한의 권위주의적 병영국가들에 의해 겨우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p.179).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군대와 이어지는 ‘남성성’이라는 것들이 1945년 이후에야 형성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상 ‘남성성’은 근대 초기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 사회진화론을 차용한 지식인들의 판타지였다는 셈이다. 그런데 발문에서도 지적되지만 박노자의 이러한 분석에는 오류가 있다. 이를테면 데카당트한 삶을 즐겼던 이상과 박태원 시절, 즉 1920~30년대 ‘모던뽀이 지식인들’은 이광수나 최남선과 다르다. 그들은 맑스주의를 배웠고 아나키즘을 익혔으며 규율화된 신체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댄디즘’은 ‘군대’라면 치를 떨 정도였는데 박노자는 그 부분을 명확하게 간과한다. 오히려 그들을 넣고 지식인들 간의 마주침과 갈라짐을 살펴보았다면 더 튼실한 논의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때문에 실망할 일은 아니다. 빈 곳은 채우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에서 오히려 아쉬운 것은 그러한 지식인들의 담론을 받아들이는 ‘민중들’의 반응이 생략되어있다. 박노자는 근대적 매체들의 ‘낭독’을 통해 신민들이 변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맑스의 <자본> 1권에도 언급되듯이 언제 그렇게 손쉽게 사람들의 몸이 변했던가. 그 폭력의 역사를 좀 더 명확하게 밝혀주는 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사회사를 쓰는 것에서 그 ‘저항’과 ‘폭력’이 사라졌을 때, 세상의 모든 것은 갑자기 도약되어 “훈육되고 군사화된 남성이라는 새로운 모델은 태평양전쟁의 “총동원” 기간 중에 그리고 1945년 이후
남한과 북한의 권위주의적 병영국가들에 의해 겨우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p.179)라는 언설을 넘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박노자의 기획이 범주로 잡고 있는 시간대와는 차이가 있고, 그 부분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이 범주로 잡은 시간대에 대한 ‘구체적’ 민중들의 기록들을 찾아봐야 하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장소의 제약’이 발견된다. 박노자의 ‘현장성’에 대한 아쉬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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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아날학파들은 끊임없이 문서고를 뒤졌다. 국문학과의 ‘근대성’을 추적하는 ‘계보학적’ 연구에 대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쉬운 것은 더 구체적인 ‘일상’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더 보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문헌은 대체로 미디어와 문학작품에 국한되는 경향. 생각해보면 ‘철학자’ 랑시에르는 19세기의 문서고를 뒤졌다. 내가 이 책을 잡은 목적은 한국의 ‘남성성’의 ‘담론’의 계보학을 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이걸로 당시의 ‘남성성’에 대한 구체적 자료를 보겠다면 좀 부족할 듯 싶다. 그 점이 좀 아쉽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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