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도시City of Borders(2009)

성스러운 도시
감독 서윤정 (2009 / 미국)
출연 사아르 네타넬, 부디, 사미라 사라야, 라비트 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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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지옥이 펼쳐지는 도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노엄 촘스키부터해서 세계의 지성인들이 매번 누가 문제고 역사적으로 어떤 맥락으로 그게 문제가 된 지를 지적한지도 이미 50년은 된 것 같다. 근데 문제는 풀리기는 커녕 점차 교착상태로 진행되는 것만 같다. 로켓 미사일이 이스라엘 측에서 불을 뿜을 때, PLO는 테러와 시위를 통해 저항한다. 경제적으로 압박을 할 때 헤즈볼라는 게릴라전으로 맞서곤 한다. 답이 안 나와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담’은 높아만 가는 것만 같다.

그런데 그 ‘담’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성스러운 도시="">는 많은 질문꺼리를 던진다(근데 제목의 번역은 누구 말마따나 ‘발번역’이다.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경계’였는데 ‘경계’가 ‘성스러운’이 되었지만 그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성스러운’ 예루살렘이라는 낡은 해석이랄까.) 그들은 전통적인 ‘스파이’도 아니다. 그들은 ‘전략적 요충지’나 ‘첩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영화의 첫 순간에 두비가 외치는 말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그저 재미보러 가는 거예요!” 그 ‘재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게이로써 자신의 파트너를 찾아 ‘슈샨’이라는 술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애인과 함께 동성애을 떳떳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 무장을 하고 ‘돌파’하거나 ‘차단’당하는 것의 수순으로 진행되는 그곳 담장은 게이들에 의해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슈샨’이라는 술집의 뜻은 ‘꽃’이란다. 생각해보니 예전 함민복 시인의 시집 이름이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였다. 여기에도 ‘꽃’이 피고 있었다. 엄격한 ‘일반’의 사고가 뚫지 못하는 ‘평화’의 공간을 ‘이반’들이 마늘어내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퀴어 네트워크(이반 네트워크)의 꽃 피우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먼저 3개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ultra-orthodox(초-교조주의) 유태인들과, 크리스찬들과, 회교들 세개 종파 모두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구태여 지옥같은 대치 상황이 아니어도 늘 괴로웠던 인생들이었다.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2005년부터 2007년까지 게이 퍼레이드가 있었는데 그들에 대한 기성 사회의 화답은 폭력과 테러와 냉대였다.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는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게이가 그 거리에서 활보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게이들은 늦은 밤 ‘슈샨’의 공동체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두비가 미국으로 가듯, 동성애에 대한 적대적 시선 때문에 사회를 뜨는 이들이 많다.

또 다른 한 편 그들 내부가 어떤 통일된 견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전형적인 유태인 사회에서의 게이인 아담의 견해와 팔레스타인이면서 유태인 파트너를 만나는 샤밀라와 그녀의 유태인 파트너 라빗의 경우는 너무나 다르다. 또한 샤밀라와 라빗의 견해도 또 다르다. 인티파타를 지지하는 샤밀라와 옆에서 멀뚱허니 서있을 수밖에 없는 유태인 라십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성적인 지향에 있어서도 드랙퀸(물론 이는 버틀러의 말마따나 퍼포먼스라고 볼 수도 있다)부터 그냥 자신의 육체가 보여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진행되는 동성애자까지 다양하다. 트랜스젠더도 있다.

하지만 ‘이반’의 공동체는 그(녀)들의 그러한 ‘차이들’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틀들이 세워놓은 담을 쉽게 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녀)들은 늘 냉대와 질시와 폭력에 힘들지만, 기존의 이름으로는 불릴 수 없기에 새로운 이름을 찾을 수밖에 없고 새로운 공간을 소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녀)들의 공간과 그(녀)들의 움직임 덕택에 강고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갈등’ 혹은 ‘전쟁 상황’에 틈새들이 출현한다. 그리고 ‘소수자’의 감수성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급진화’시킨다.

물론 ‘슈샨’에 열린 공간이래봐야 사실 대다수의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있어의 ‘평화’와는 큰 간극을 가질 수밖에 없기도 하다. 적대적으로 말하는 누군가가 끝까지 비판을 몰아붙인다면, 그러한 ‘숨틀 공간’ 때문에 오히려 적대가 유지될 수도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경계를 넘나들며 피어나는 꽃들의 의미를 그것 때문에 완전히 소거할 수 있을까.

감독인 서윤정은 영화 후에 진행된 G/V 섹션에서 자신이 Korea-American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한국이 남북 갈등이라는 상황을 겪고 있으며 식민지의 경험을 통해 ‘점령당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영화를 기획했다고 했다. 영화는 그녀의 그러한 ‘특수한 정체성’과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가진 한국사람의 관점들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 안에서는 생략된 사람은 ‘신변’ 문제 때문이었단다. ‘이반’을 받아줄 수 없는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또한 ‘다큐멘터리’나 ‘영상인류학’을 진행함에 있어서 만드는 이와 거기에 출연하는 이와의 관계맺음과 비밀을 지키는 일 등을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에서는 그나마도 훨씬 더 ‘호모포비아’가 강한듯 하지만. 어쨌거나 그(녀)들의 삶에 ‘평화’가. 그리고 그(녀)들의 평화가 경계에 꽃을 계속 피워 아름다운 숲을 만들 수 있기를. 평화를 기존의 ‘좌파’들이 책상머리에서 두드리고 있을 때 이들은 ‘사랑’을 통해서 극복한 것 아닐까. ‘소수자’ 운동의 힘을 보여줬다고 해야하지 않을까.